[생활 속의 사회교리] 평화를 위협하는 사람들에 대한 제재 조치 지난 7월 4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발사가 있었습니다. 거듭된 핵 실험, 미사일 발사 실험에 이어서 미국 본토까지 겨냥한다는 이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보면, 세상을 향한 북한 정권의 메시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북한식 표현대로라면 ‘총창 우에(위에) 평화’를 끝까지 고수하겠다는 것인데, 이러한 북한의 행동에 대해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또다시 ‘더 강화된’ 경제제재 결의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북한의 행동을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군사적 조치로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으니까 경제제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지금까지 ‘나쁜 국가’들에 대한 경제제재 효과에 대해 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이어진 경제제재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북한에 대한 서방국가의 경제제재 조치는 그 역사가 짧지 않습니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수출통제법을 적용해서 북한에 대한 수출을 모두 금지하는 무역금수조치(embargo)를 취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하자 미국은 1950년 12월 17일 ‘국가비상’을 선포하면서, 북한에 「적성국교역법」을 적용하고 재무부에 해외자산통제국(OFAC)을 신설합니다. 이 부처에서 해외자산통제규정(FACR)을 공포함에 따라 북한은 전면적인 무역금수조치를 받습니다. 이후 수없이 많은 복잡한 조항들을 추가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제재했고, 북한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그리고 6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간추린 사회교리>를 보면, ‘평화를 위협하는 사람들에 대한 제재 조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오늘날의 국제 질서가 규정한 형태의 제재는 평화와 질서 위에 세워진 국제 공존의 규칙을 침해하거나 자국민을 심각하게 억압하는 국가 정부의 행위를 바로잡아 주려는 것이다. 이러한 제재의 목적이 명확히 규정되어야 하며, 국제 공동체의 관할 기구들은 때때로 채택된 조치들의 효율성과 그 조치들이 민간인들에게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그러한 조치들의 참된 목적은 협상과 대화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제재가 결코 국민 전체에 대한 직접적 처벌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 전체, 특히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이 그러한 제재로 고통받게 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다. 특히 경제적 제재는 지극히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하는 수단이며, 엄격한 합법적 윤리적 기준을 따라야 한다. 경제 봉쇄는 기간이 한정적이어야 하며, 그에 따른 효과가 뚜렷하지 않을 때는 정당화될 수 없다.”(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간추린 사회교리> 507항) 이처럼 경제제재 조치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그 목적과 효율성 뿐 아니라 제재를 수행하는 방식이나 제재가 이어지는 기간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군사적인 행동처럼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제재를 통해서도 어떤 경우에는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경제제재는 처벌받아야 하는 독재자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반대로 불의한 정권에 의해 억압받던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보는 함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이 등 힘없는 사람들의 생존에 더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라크의 경우에도, 결국 전쟁으로도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1990년대 이어진 오랜 경제제재로 수십만에서 수백만까지도 사회적 약자들이 희생됐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교리는 어떤 국가나 국제적인 단체가 이러한 강제력을 행사할 때 신중한 판단을 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경제제재의 목적이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라 북한을 ‘교정’하기 위 한 목적이라면, (사실 ‘교정’하기도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변화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고민할 수 있어야합니다. 경제제재로 인해 북한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구성원’에게 더 많은 피해가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와 북한의 핵 문제 등은 국제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하는 난제입니다. 남과 북의 문제만이 아니라, 강대국의 이해관계까지 얽혀 있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갈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분열과 적대의 악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면,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하는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북한을 제재하는 것도, 북한을 변화시키는 문제도 ‘쉬운 답’으로는 풀어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의를 위한 제재 조치들이 불의를 강화시키지 않았는지 반추하면서, 신앙을 가진 우리들이 이 땅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 간절하게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2017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일 의정부주보 6-7면, 강주석 베드로 신부(민족화해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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