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친교의 하느님과 공동체적인 인간 성경에 나타난 친교의 하느님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만을 사랑하시지 않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오시고, 또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것이지요. 그분은 나와 더불어 만이 아니라 다른 이와도 함께 사랑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사랑의 하느님, 친교의 하느님이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인 동시에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와 함께 당신의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시며, 우리 모두를 그 사랑의 친교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러한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사랑과 친교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이 전해주는 내용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자애로움으로 다가가시고, 그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 백성에게 호의를 보이시고, 그를 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분’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사랑에 빠진 분’으로, 때로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당신 백성에게 반한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지요. 이렇게 구약성경에서 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과 인간,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성경을 볼 때 관심을 두고 봐야 할 것은,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과 인간의 태도, 그리고 이스라엘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입니다. 이러한 관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러 가지로 자신에게 불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스라엘을 특별한 소유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를 특별하게 사랑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모든 만물을 당신을 위한 소유물로 삼으셨지만 이스라엘은 특별한 소유물로 취급하셨지요.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새롭게 이 특별한 소유관계를 상기하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바로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해방입니다.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 그 시초에 이방인 통치에서의 해방이 자리하고 있고, 이 해방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의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백성 됨은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체결로 완성되었습니다.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기에, 자신을 그 백성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그 백성과 계약을 체결하셨기에, 야훼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엔 쌍방의 의무라는 이중적인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야훼께 대한 충실과 야훼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 그것입니다. 이 이중적인 관계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의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따라야 할 이스라엘 야훼가 이스라엘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기에(레위 20,26 참조), 이스라엘은 그분에게 사랑을 보이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야훼께서 바라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에 의해서 형성된 작품과 같은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사랑을 보이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또 드러나는 것은 이스라엘의 행동이 신적인 선택행위에 상응하지 않게 되면 하느님의 심판이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신명 4, 26.27 참조) 이스라엘을 뭇 민족 가운데서 흩으시고 사라지게 할 것이라는 야훼의 말씀은 결코 이스라엘에 대한 마지막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야훼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시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남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일은 아무런 대가를 치름이 없이 그저 되는 일이 아니라 유배의 벌과 같은 심판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공동체적 인간 우리는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 속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아무리 튼튼한 나무도 그가 자리한 숲의 나무들을 다 베어버리면, 허허벌판의 거센 바람을 홀로 견뎌내면서는 잘 살아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한 그루의 나무도 그렇다면 이미 태초부터 함께 살도록 창조된 사람은 어떠할까요? 하느님은 우리가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이와 함께 살아가기를, 그것도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실지로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혼자 살지 않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혼자 사는 저같은 독신의 성직자들조차 그러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친교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함께 있다는 것이 바로 친교의 삶의 출발점입니다. 진정한 인간의 삶은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함께 있도록 창조되었기에, 우리는 함께 사는 사람들을 그저 내가 필요해서 이용하는 대상으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살 되 세상의 사람들을 오직 나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할 그 무엇으로만 여기고 사는 사람은 이미 참된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정말 내가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로, 나도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 할 사람으로 여길 수 있어야 참된 사람인 것이지요. 우리를 친교로 부르고 계신 하느님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저 내가 필요하면 믿고, 필요 없다 싶으면 버려도 좋을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나와 별 관계가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나와 본질적인 관계가 있는, 내가 말씀을 건네고 말씀을 듣고 대화하며 만날 수 있는 상대자, 대화의 파트너와 같은 ‘너’이신 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의 친교 속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친교 없이는 하느님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친교의 하느님이시고, 친교의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과의 사랑에로, 곧 친교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친교의 관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사랑의 응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친교의 삶을 사는 나에게 하느님은 결코 나와 무관한 그 어떤 분이 아니라, 바로 내 사랑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레지오 단원 여러분!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하느님은 혹시 나에게 그저 그 무엇이 아닙니까? 또 나와 내가 아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친교는 오직 ‘나와 인격적인 대상으로서의 너’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8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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