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찾아서] 병자성사 삶에서 돌아가신 분을 화장한 뒤 유족들이 그 유골을 강이나 바다, 산에 뿌리는 모습을 드라마 등에서 가끔 볼 수 있다. ‘인간은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이 세상과 하나 되어 영원히 인간 세계에 머물라.’는 바람도 있는 것 같다. 또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려야만 새로운 세상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산이든, 바다든, 나무 밑이든, 잔디든, 허공이든, 유골을 뿌리는 행위인 ‘산골’(散骨)을 허용하지 않는다. 교회가 이를 금지하는 이유는 부활 신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부활 신앙은 ‘죽음으로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되지만, 부활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에 썩지 않을 생명을 주시며, 이 육신은 우리의 영혼과 다시 결합하여 변모될 것’(가톨릭교회 교리서, 997항 참조)이라는 희망이다. ‘산골’에는 죽음에 관한 잘못된 생각, 곧 죽음을 인간의 완전한 소멸로, 자연이나 우주와 융합되는 순간으로, 윤회의 한 단계로 여기는 그릇된 사상이 포함되어 있어 부활 신앙과 맞지 않다. 그러나 교회는 거룩한 장소인 묘지 공간에 마련된 수목이나 잔디에 유골을 묻고, 고인의 이름이 적힌 비석이나 푯말을 세우는 자연장은 허용한다. 어떤 경우든지 ‘유골을 뿌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 적당한 안치소에 이름을 표기하고 매장하여 고인을 추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봉안 기간이 끝난 유골 또한 마음대로 뿌려서는 안 된다. 다가가기 ‘떠나는 이들의 성사’라고도 불리는 병자성사는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려는 성사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의 하소연을 들으시고(시편 38편 참조), 당신 스스로 그들을 ‘낫게 하는 주님’이라 말씀하시며(탈출 15,26 참조), 당신의 용서가 치유의 출발점이 되게 하셨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병자들을 동정하시고, 여러 가지 병을 고쳐주셨으며,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내 이름으로…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명은 야고보 서간에 아주 자세하고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5,14-15). 이를 통해 병자성사는 이미 사도 시대부터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교회의 거룩한 전통은 이 예식을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 중의 하나로 인정하였다. ‘마지막 도유’라는 의미의 ‘종부성사’(終傅聖事)라고도 불렸던 병자성사는 죽기 전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다고 오랫동안 가르쳐 왔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후에는 반복하여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곧, 병자성사를 받은 병자가 건강을 회복하여 어느 정도 생활하다가 또다시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면 다시 이 성사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같은 병으로 앓다가 병이 더 중해지는 경우에도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다. 급격히 쇠약해지는 노인들이나 중한 수술을 앞둔 환자들도 이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515항 참조). 흔히 병원이나 병자의 집에서 개인적으로 베풀어지는 병자성사는 언제나 전례적이고 공동체적으로 거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병자성사를 “주님의 파스카를 기념하는 미사 중에 거행하는 것이 매우 합당하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517항)고 가르친다. 병자성사는 고해성사와 노자(路資) 성체를 모시는 성체성사와 함께 베풀어진다. 병자가 의식이 있다면 고해성사를 먼저 베풀고 축성된 성유를 병자의 이마와 두 손에 바르면서 기도를 바치며 병자성사를 거행한다. 병자에게 세상을 떠나기 전 성체를 마지막으로 모시게 해 주는 노자 성체는 마치 먼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여비처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며 부활의 힘을 의미한다. 노자 성체는 미사 때나 미사 밖에서 줄 수 있는데, 병자의 곁에서 미사를 드린다면 미사 때에 노자 성체를 줄 수 있다. 이때 성체를 모실 수 없는 병자에게는 성혈만으로 모시게 할 수도 있다. 살펴보기 사람들은 질병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매진하기도 한다. 질병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돌아오게 이끄는 역할을 할 수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501항 참조).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육체적 질병이 어떻게 영적 기도를 통해 치유가 될 수 있는지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질병과 고통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유한함과 무능력함을 체험하고, 때론 죽음을 예감하게 된다. 하지만 극심한 육체적 고통은 어려운 영적 시련을 동반한다는 것을 우리는 한 번쯤 체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 나아가 그분의 존재까지도 의심하게 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오죽하면 구약의 욥의 아내도 육적인 고통과 절망에 빠진 욥을 보면서 ‘하느님을 저주하라.’(욥 2,9 참조)고 권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치유를 물질적인 방법으로, 곧 눈에 보이는 질료를 통해 행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의 눈에 ‘진흙과 침’을 바름으로써 고쳐 주셨다(요한 9,6-7 참조). 사도들도 앓는 사람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였다(야고 5,14 참조). 병자성사의 중요한 도구인 기름은 이미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기름은 병을 낫게 하는 여러 가지 약의 주성분이었고, 경기장에서 운동선수들이 자기 몸에 바름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물질적 질료인 기름은 우리를 영적으로 치유하고 영적인 힘을 강화시킨다. 더 나아가 도유는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의 육체적인 고통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죄와 악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굳건히 지켜 준다. 그러므로 기름을 바르는 예식은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있을 최후의 싸움에 대비한 지상 생활의 마지막 방패인 셈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523항 참조). 결심하기 병자성사는 주교와 신부들만이 거행할 수 있으며, 오직 세례를 받은 신자만이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비신자는 이 병자성사를 받을 수 없다. 신자가 병자성사를 받고 숨을 거두면 가족은 소속 본당의 사무실이나 위령회에 알리고, 장례 일정을 본당 신부와 상의하여 정한다. 빈소를 정하여 사람들에게 알리고 신자들과 함께 연도를 바치는 가운데, 운명한 지 24시간이 지나 죽음이 확인되면 염습과 입관을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화장도 허락한다. 화장을 선택한 경우, 신자의 유골은 거룩한 장소, 곧 묘지나 교회가 정한 장소에 보존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봉안당에 봉안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되기에 허용 가능하다. 그러나 육신의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방법은 여전히 ‘매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박종주 베드로 - 부산교구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장으로 일하며 차별화된 가톨릭 평생 교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교리 교육을 가르쳤다. [경향잡지, 2017년 8월호, 박종주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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