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안중근(토마스) 의사 100년의 恨
종교가 민족 아픔 외면할 수 있나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30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울려 퍼진 일곱 발의 총성. 연해주, 만주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안중근 의사가 민족과 평화의 이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입니다.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으로 조선 면적의 50.4%를 빼앗고 농업, 농민은 몰락하여 고향을 등진 40만 농민이 하와이, 연해주, 만주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역사학자 정재정은 “일본인 한 집이 들어오면 다섯 집의 한국인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젊은이들을 아시아 침략전쟁에, 탄광에, 저 끝없는 암흑으로 끌고 갔습니다. 중국 남경대학살기념관에 12초마다 물방울이 떨어지게 설계한 공간은 당시 일제가 12초에 한 명을 죽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소녀들에게 성노예를 강요했고 거부하면 공개적으로 팔, 다리, 몸통을 잘라 죽였습니다. 대학살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간 30만여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기념관을 둘러보는 것은 숨 막히는 팽팽한 긴장과 경악의 시간입니다. 같은 기간 36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능욕을 당하며 지냈다고 알려진 ‘남경 위안소’ 옛터. 아! 일제는 그렇게 잔혹했습니다. 강간, 생매장, 기름 뿌려 태우고…. 난징 대도살이라 불리는 이유이며 몸서리쳐지는 아시아의 홀로코스트입니다. 30세의 청년 안중근은 고통 받는 이웃의 절규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조국이 제국주의 일본에 유린당하고 일제가 동양의 평화를 깨트리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으나 신앙인으로서 고통 받는 형제자매를 구해야 함 또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구원한다”(「간추린 사회교리」 52항)는 당연한 복음의 정신을 인식한 것입니다. 그의 거사는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이며 그것은 인간의 신원과 사회의식, 그리고 역사적·사회적 차원에 미치는 그 구체적 영향을 완전하고 새롭게 드러나게 한다”(52항)는 가르침을 실제화한 것입니다. 그는 1908년 6월 함북 경흥군 노면, 신아산에서 일제와의 전투에서 이겼지만 얼마 후 일제의 기습을 받아 처참히 패배했습니다. 이때 기습은 동지들의 반대에도 전투에서 생포한 일제 포로를 국제공법에 따라 석방했고 석방된 그들이 보복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끝내 그의 부대는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의 사려 깊은 인권의식과 고매한 인격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조선과 이웃을 위한 그의 희생을 교회가 배척하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가 뤼순(旅順) 감옥에 있을 때 홍석구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요청했으나 당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閔德孝) 주교가 “테러리스트에게 성사를 허용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뮈텔 주교의 지시를 어기고 감옥을 찾은 홍석구 신부의 용기로 그는 다행히 신앙인의 마지막 품위를 지켰습니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순국 후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은 일제의 태도를 “당연한 일”이라고 옹호했습니다.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시신이 100년 넘도록 조국으로 오지 못한 이유이며 그가 민족의 한(恨)으로 가묘로 효창공원에 있는 이유입니다. 종교가 민족과 이웃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다는 그의 모습에서 청년 예수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10월 26일 그의 거사 108년 되는 날, 하염없이 높은 효창공원 가을하늘에 그가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 양운기 수사(한국순교복자수도회) -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소속.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상임위원이며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다. 현재 나루터 공동체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1월 5일, 양운기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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