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홍수 피해 입은 北 주민께 용서 청해
이웃 고통 외면한 우리 모습 부끄러워 지난해 7월 두만강 쪽 접경지대를 갔습니다. 강 건너 남쪽의 함경북도와 양강도의 낡은 주택들이며 주민들의 옷차림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습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측의 변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중국의 접경지역에서 남쪽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한국에서 평양을 방문하여 여러 도시와 지방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접경 지역에서 남쪽을 바라봄은 조선족 동포들이 중국-만주-에 살면서, 중국인으로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남쪽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은 교포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만강 너머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교포라고 하지 않고 조선족이라는 이름의 사연을 지닌 채 살고 있음입니다. 동쪽 끝에 있는 훈춘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며 바라본 우리 산하는 늘 고요와 긴장입니다. 20년 전, 10년 전, 지금도 거의 변화가 없는 그야말로 동토(凍土)였습니다. 동행한 북한이탈주민이 자신이 탈북했던 통로를 가리킬 땐 그가 국경을 넘어 3일 동안 숲에 숨어 있다 강을 건너는 모습이 연상되어 팽팽한 긴장과 두려움에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올해 5월엔 용정에서 개산툰(开山屯)을 거쳐 도문으로 약 45㎞를 이동했습니다. 작년 8월, 해방 후 최악의 재앙을 당한 두만강 주변이 궁금했습니다. 꼬불꼬불 비포장도로는 시멘트 포장으로 바뀌고 군인들의 경계가 삼엄했지만 사드가 한국에 배치된 문제로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철저한 검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 개산툰에 접어들 즈음 도로에 붙은 철조망 오른편 두만강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개천 같던 좁은 강은 넓은 강의 모습으로 변했고 포장이 뜯긴 도로는 움푹 패여 차량이 좌우로 휘청거렸습니다. 강 건너 쪽이나 중국이나 두만강 양쪽은 아직도 복구가 더디고 홍수가 접경 지역을 할퀴고 간 자리는 허연 속살을 드러낸 채 방치돼 있고, 언덕 위 주택들은 터무니없는 속도로 복구되고 있었습니다. 도문 지역의 강 건너편 북쪽 지역의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해방 후 처음 겪는 대재앙으로 약 13만 가구의 이재민이 발생했지만 국내는 조용했습니다. 정부는 북쪽의 핵실험을 이유로 대북관계에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고 민간 지원도, 언론통제로 우린 그렇게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야만인으로 살았던 것이 작년입니다. 두만강의 처참함과 쓸려가고 폐허가 된 주택들을 보면서 홍수에 쓸려가는 주민들이 연상되며 가슴이 아리고 부끄러웠습니다. 작년 남쪽의 많은 사람들은 언론의 통제와 정부의 일방적 관계단절에 따라 그토록 잔인하게 가을을 넘겼고 부패한 권력을 끌어내리는 탄핵 정국에서 북쪽 인민들의 피해를 망각했습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9월 21일에 인도적 지원을 하기로 결정한 800만 달러를, 아니 그 이상을 서둘러 집행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한 가족”(「사목헌장」 24항)을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상식이란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때 우린 모두 그분의 자녀가 아닙니까? 하물며 하늘을 섬기는 신앙인이 아닙니까? 아니, 신앙이 아니라도 사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속절없는 추위가 이미 두만강을 엄습하고 있습니다. * 양운기 수사(한국순교복자수도회) -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소속.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상임위원이며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다. 현재 나루터 공동체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1월 26일, 양운기 수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