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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교리: 균형 잡힌 신앙생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07 조회수5,450 추천수0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균형 잡힌 신앙생활 (1)

 

 

‘이미’와 ‘아직’의 구원과 그 희망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며 살아갑니다. 그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나라이기도 합니다. 정확하게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나라이지요. 이렇게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존재가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즉 우리는 현재에 진행 중인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희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나라가 현재에 진행 중이고,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은 나의 시간과 삶 하나하나가 다 하느님의 나라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서도 안 되겠고, 무조건 절제하면서 기도만 하고 살자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서도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건전한 사회생활의 중요성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이라는 책에 ‘건전한 사회생활이 천국 가는 기초’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지상생활에는 세 가지의 측면이 있다. 하나는 도덕적 생활이요, 하나는 시민생활이요, 또 하나는 영적생활이다. / 천국 가는 길은 이 세 가지 생활을 균형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사회에서 선량한 시민이 되려면 도덕적 생활과 시민생활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 선량한 시민생활이 종교생활과 조화되고, 종교가 없는 사람은 자기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261쪽) 우리가 사는 세상생활은 크게 도덕적, 시민적, 영적인 생활로 이루어지는데,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세 가지 생활을 균형 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교신자들도 양심적으로 살아가야 하고 사회생활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우리 천주교신자들도 한 나라의 국민이자 시민으로서 사회생활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사회생활을 잘하는 것일까요? 천국에 들기 위해, 세상을 버리고 육적 욕정을 단념하며 영적인 생활만 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재산이나 명예와 같은 세속적인 것을 모두 포기하고, 수도자처럼 신이나 구원이나 영생만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명상의 날을 보내야만 할까요?

 

어떤 수도자가 죽어 하늘나라를 지키는 베드로 앞에 나아갔는데 문 앞에서 쫓겨났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입국을 거부당하자 그 수도자는 말합니다. “내가 그래도 속세를 버리고 입산하여 경건하게 명상만 하는 수도생활을 한 사람인데, 나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답니다. “너는 이웃 사랑에 전혀 관심이 없이 평생을 이웃을 기피해 살았는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었겠는가? 너는 이웃 사랑의 의무를 회피하였고, 같이 살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하면서, 스스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너는 세상을 오직 너 자신만을 위해서 산 사람이다.”

 

여러분, 우리 사람이 천국에 가는 길은 수도자로서의 생활만일 수가 없습니다. 사회 속에서 두 발로 땅을 굳건히 디디고, 다른 사람들과 깊이 어울려 사는 건전한 사회생활도 참으로 중요한 것이지요.

 

 

충실하게 일하며 사랑하고 봉사하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생활에서 자기사랑과 세상사랑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속세를 떠나는 것이다. 산중수도로 들어가는 것이 속세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 작지만 쉬운 방법으로 우선 남을 위해서 하루에 꼭 한 가지씩 좋은 일을 하기로 결심해보는 것이다. 좋은 일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잔 대접하는 것도 이웃사랑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자기의 직업에 충실한 것이다. 내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262쪽) 무슨 말입니까? 이기심, 세상의 재물과 유혹에 대한 잘못된 집착, 이러한 욕망에서 벗어나기를 노력하고, 나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며, 봉사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러 오신 주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함께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친교만이 아니라, 나와 이웃과의 친교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웃과의 친교를 소홀히 하고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바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남을 제대로 알고 배려하는 사랑의 실천

 

이웃과의 친교를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우리지만, 내 마음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 헨리가 쓴 ‘마녀의 빵’ 단편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이 마흔에 조그마한 빵집을 운영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주일에 두세 번 가게를 찾아와 언제나 딱딱한 식빵만을 사가는 한 중년 남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화가로 보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식빵 안에 갓 배달된 버터를 듬뿍 발라 두었습니다. (그 빵이 그녀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그 남자는 직업이 건축설계사였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 새 시청청사를 건축하기 위한 공모전에 응모할 설계도를 그렸던 그는 이제 마지막 작업을 남겨두고 빵집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는 큰 종이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잉크를 덧대어 그린 뒤 딱딱한 식빵으로 연필 자국을 지워나갔는데요…… 버터가 든 빵으로 잉크 그림을 건드리게 되었으니……”

 

심혈을 기울인 그 남자의 작품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렇듯 내가 누구에게 베푸는 사랑도 내가 그 상대방을 제대로 알고 배려할 때, 그때에야 가치 있는 사랑의 실천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서로를 완성하는 사랑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콜로 3,14)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사랑은 부족한 우리를 채워주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시인 나태주가 쓴 ‘완성’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집에 밥이 있어도 나는 / 아내 없으면 밥 안 먹는 사람 // 내가 데려다 주지 않으면 아내는 / 서울 딸네 집에도 못 가는 사람 //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면서 / 반편이 인간으로 완성되고 말았다.”

 

시인은 남편은 아내가 있어야 밥을 먹고 살고, 아내는 남편이 있어야 자식들도 방문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 반편에 불과하던 서로는 서로의 사랑으로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었다고 읊고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우리 안에 심어두신 사랑에는 부족한 우리를 완성해 나가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부족한 서로 서로를 완성해 나가는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됩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3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목국장,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균형 잡힌 신앙생활 (2)

 

 

항상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요구하신 회개에는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우리의 회심과 노력도 포함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항상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글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변화는 생각에서 행동에까지 이어질 때 가능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는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실로 성스러워지기 위해서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정의롭다고 인정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외적인 행동은 하느님의 영광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들뿐이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라고 성서는 우리에게 말한다(로마 3,10) 우리는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모두 변모시켜야 한다. 이는 평생이 걸리는 과제이기도 하다.”(베네딕트 J.그뢰센, 김은희 역, 우리 곁에 있는 하느님나라, 바오로딸, 1999, 24-25쪽)

 

교회가 항상 쇄신되어야 하듯이, 우리 신앙인도 늘 회심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노력만큼, 우리가 추구하는 균형 잡힌 신앙생활의 실현도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참된 신앙을 살아가기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윤재윤 판사가 쓴 ‘날개 없는 신앙’이라는 제목의 글에 의하면, 참 신앙을 사는 사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자아에 대한 관심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적다.”

– “자기의 안락, 이익, 명예에 대한 욕심도 적은 반면,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필요에 대해서는 훨씬 민감해 기꺼이 남을 돕는다.”

– “말 대신, 삶의 태도와 행동으로 자신이 누리는 기쁨과 평화를 보여 준다.”

– “삶에 영원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평안하다.”

 

그런가하면 껍데기 신앙을 가진 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입니다.

 

– “말이 앞서고, 삶에서 기쁨과 평화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 근본체질이 변화되지 않은 것이다.”

– “자기 이익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므로 항상 자아가 중심이 되어 손해 보는 법이 없다.”

–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지, 진리에 몸을 바치겠다는 결단이 없다.”

– “이런 사람일수록 종교적 독선에 빠져 교리를 내세우고 타인을 비판한다. 잘못된 신앙은 무종교보다 더 해롭다.”

 

윤 판사는 내 자신의 신앙이 참 신앙인지 껍데기 신앙인지 아는 방법은 단순하다고 하면서,  다음 세 가지를 살펴보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 “자신에 대한 관심, 곧 욕심이 줄었는지.”

– “타인에 대한 관심, 곧 사랑이 늘었는지.”

– “사는 맛이 새로워졌는지, 곧 삶의 의미가 있는지.”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결국 이름만 신자로서 허울뿐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참 신앙을 사는 사람이고,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새롭고 기쁘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균형을 갖춘 행복한 신앙생활

 

나는 참 신앙을 살고 있습니까? 껍데기뿐인 신앙을 살고 있습니까? 나는 신앙인답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혹시 신앙이 없는 사람과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윤 판사는 종교인의 완고한 모습을 안타까이 여기며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만난 종교인 대부분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완고한 모습을 보였고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막무가내로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종교인이 관여된 소송사건을 심리하기가 훨씬 어렵고, 화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경직되고 편협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인도할 수 있을까? 종교인이라는 신분이 인간성을 억압하는 굴레가 된 것이다. … 신(神)이 원하는 것은 외적으로 성공한 삶이 아니라, 자유롭고 새롭게 변화된 삶이다. 날아오르지 못하는 삶, 날개 없는 신앙은 참된 것이 아니다.”

 

나는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나는 하느님의 뜻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나는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그 깨달음을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 보내야 할 것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나의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6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고 하셨는데, 평생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머리로 깨닫고 가슴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기뻐하며 말입니다.

 

교리를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은 그 자체로 짐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라기보다 일상생활에 행복을 주는 생활입니다. 사랑의 주님을 믿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은 원래가 기쁘고 밝은 것입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과 십자가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그 모든 짐은 편하고 가벼울 수가 있는 것이지요.

 

 

자신을 봉헌하는 신앙생활

 

끝으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신앙생활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바오로 사도께서는 우리가 드려야 할 합당한 예배란 내 자신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제물로 바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봉헌은 어떠한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곧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삶이겠습니다. 또한 그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이겠습니다.

 

레지오 단원 여러분!

 

자신을 봉헌하는 삶은 또한 성령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삶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또한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이 전부인 삶을 살아가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참된 행복을 지금부터 바라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바로 이러한 삶을 기쁘고 보람되게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3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목국장,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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