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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리를 찾아서: 죄 -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24 조회수5,032 추천수0

[진리를 찾아서 – 죄]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부활과 성탄을 앞두고 고해소 앞에서 ‘무슨 죄가 있다고 고백을 하라는 거야?’ 하며 판공이 주는 부담에 불평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확실히 저지른 잘못이 없는 제게 ‘죄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 경험

 

요즘은 죄인이라 인정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회원들은 종종 자신들을 “죄인이면서 예수님의 벗으로 부름받은 이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죄인인데 어떻게 예수님과 벗이 될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복음서를 잘 읽어 보신 분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도 친분을 가지셨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역설적인 사실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일부러 죄짓는 게 좋겠다 싶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아이들이 종종 부모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못되서가 아니라 그만큼 부모의 관심을 원하는 것이니까요. 정말이지 아이들처럼 죄를 지어서라도 하느님을 내 곁에 붙잡아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마음은 건강한 신앙인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유아기적 태도에 머물러 있는 수준입니다.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건강한 사랑이 내 요구만으로 점철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아프지만, 관계를 통하여 삶을 배우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합니다. 성숙한 관계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 가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그러니 ‘일부러’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 이들은 죄인이 아니라 ‘악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의도적으로 반복되는 죄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신뢰로 묶여야 할 관계를 파괴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는 기쁨과 상호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그사이에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그들이 이루어 놓은 기쁨과 신뢰는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며, 그들의 관계를 더욱 풍요롭고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관계는 오래 지속됩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아껴 주셨지만, 그들이 계속 죄짓기를 바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현실이 녹록지 않습니다. 우리가 겪는 현실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로마 7,18-20).

 

세례를 통해 깨끗해져서 천사 같이 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때가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 대신 묘사해 준 이런 현실 때문에 우리는 자주 좌절감을 맛봅니다. 의지박약하고 나약한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죠.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지친 목소리로 울려오는 말은 고해소에서 자주 듣게 되는 “사는 게 죄지요.”라는 푸념입니다. 한 아이가 고해를 앞두고 이 순간은 괜찮지만, 고해소에서 나가면 금방 엄마가 안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리란 것을 알고 “앞으로 한 시간 뒤에 지을 죄도 용서해 달라.”라고 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죄는 실망감을 주기도 하지만 신비로운 무엇입니다. 죄인을 부르시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준 계기지만 계속 죄를 짓는 건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행위이니 분명 끊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그것을 끊고자 하는 회심과 그 실천 사이를 부단히 오갑니다. 이로 말미암아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집나간 아이가 돌아오기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 성찰

 

우리는 모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내가 지은 죄는 아니지만 최초의 인간이 지은 죄라서 모든 인간에게 남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가 동시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통시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해 줍니다.

 

원죄는 인류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표식입니다.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닮았으면서도 온전히 일치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한평생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는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는 첫걸음이 세례성사이며, 이 성사를 통해 우리는 원죄와 지금껏 지었던 죄를 씻습니다.

 

세례 이후에도 인간의 나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세례를 통해 씻은 원죄 외의 죄를 ‘본죄’라고 합니다. 본죄는 ‘대죄’(죽을죄)와 ‘소죄’(용서받을 죄)로 나뉩니다. 죄가 경중에 따라 평가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죄가 대죄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중대한 문제를 대상으로 합니다. 예컨대 살인이나 강간 등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는 행위와 우상 숭배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보통 십계명에 제시된 사안이 기준이 됩니다. 둘째, 그 사안이 중대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 고의로 저지른 것이어야 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55-1857항 참조). 대죄를 죽을죄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행위의 위중함을 강조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인의 회심과 하느님의 자비가 만나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편으로 소죄는 대죄가 성립되는 조건이 결여된 것입니다. 보통 무질서한 삶과 관련됩니다. 예컨대 어려운 일을 회피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죄는 대죄보다 가볍다고는 하지만 자꾸 쌓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부단히 참회해야 하며 그 일이 반복되는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심도 있게 성찰한다면 이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죄는 고의든 아니든 행위를 통해 실행됨으로써 드러납니다.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도 개인의 의지가 지속해서 양심을 거스르고 있다면 그 자체로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실행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니까요.

 

하느님께서도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6-7) 이처럼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원천적으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데서 기인합니다.

 

 

셋, 실천

 

성찰을 통해 내가 주로 저지르는 악습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본다면, 내 삶을 그와는 반대의 흐름으로 이끌어 줄 덕목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대죄, 소죄와 더불어 그 자체가 죄이면서 악습을 유발하는 근원을 일곱 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이를 ‘칠죄종’이라 하며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를 일컫습니다.

 

이것을 앞에 나열해 두고 내가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잘못에 대해 좀 더 집중적으로 성찰해 봅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특정한 죄종에 가까운 경향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질서한 상태라면 위험합니다.

 

죄는 무질서한 집착이 자라나 나와 내 주변의 관계를 해치는 형태로 드러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결국, 죄란 사람이 이 세상에 생겨난 근본 목적인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봉사하여 자신의 영혼을 구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떼어놓습니다.

 

자신의 죄를 헤아리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 수련」 53항을 통해서 죄를 헤아릴 때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그리스도를 상상하라고 합니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분이 내 앞에 계십니다. 그분의 사랑으로써, 나는 부단히 용서받으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 ‘고맙습니다.’ 하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나도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다음을 자문해 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십자가의 예수님께 내가 느끼는 바를 말씀드립니다.”

 

죄짓지 않으려거든 죄지을 기회나 환경을 원천적으로 피하는 게 최선일 겁니다. 어쩌다 죄짓게 되더라도 어서 뉘우치고, 죄지은 그 이상으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벗으로 부름받은 죄인’이 있는 겁니다.

 

* 박종인 요한 - 예수회 신부. 청소년 사목을 맡고 있으며, 서강대학교에서 ‘성찰과 성장’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교회 상식 속풀이」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8년 3월호, 박종인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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