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따라 걷기] 둘째 계명 :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하느님의 이름을 올바로 불러라 - 마르 5,1-20 묵상 사람을 괴롭히던 더러운 영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 제발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감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했지요 사람을 괴롭히는 짓거리에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더러운 영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지 못하게 내쫓았지요 아무 때나 제멋대로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더러운 영들과 함께 놀아나는 더러운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이름을 올바로 부르라 하시네요 제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이 든든히 채워 주기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삶으로써 말씀하시네요 다른 이 죽이는 착취와 억압이 아니라 모두를 살리는 베풂과 섬김을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삶으로써 말씀하시네요 굴종을 강요하는 폭력이 아니라 더불어 보듬는 평화를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삶으로써 말씀하시네요 거짓과 비난 가득한 그릇됨이 아니라 진실과 관용 넘치는 올바름을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삶으로써 말씀하시네요 제 살려고 벗을 죽이는 비겁함이 아니라 벗을 살리려 자신을 죽이는 용기를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삶으로써 말씀하시네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하느님께 참을 수 없는 모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찬미가 되게 하라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픈 우리를 일깨우시네요 믿음과 우상 숭배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이 누구시냐고 묻는다면 ‘하느님은 하느님’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이름을 묻자,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탈출 20,4-5). 하느님은 당신을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알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알려 주시는 만큼만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과 ‘성전’이라는 계시의 두 원천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알려 주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믿음’이고, ‘하느님은 이래야 한다. 하느님은 저래야 한다.’라고 하느님을 규정하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믿는 이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지만, 우상 숭배자는 하느님을 자신에게 맞춥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과 우상 숭배 전쟁 중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은 신의 이름으로 벌이는 성전(聖戰)이라고 합니다. 한 치의 양보 없이 나와 너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만 끝나는 전쟁이 바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신의 이름을 걸었으니 어느 쪽도 물러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느님께서 전쟁을 원하실까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걸고 전쟁을 벌인 이들이 승리한다고 과연 기뻐하실까요? 성전을 일으킨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는 무자비한 폭력을 정당화하고자 신의 이름을 파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굳이 성전까지는 아니라 해도, 우리는 일상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너무나도 쉽게 함부로 부르곤 합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곧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늘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돈을 벌려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하느님을 돈벌이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권력과 지위를 얻으려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하느님을 권력의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아픈 이와 약한 이를 돌보는 대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는 것으로 ‘실천 없는 헛된 믿음’(야고 2,20 참조)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써 오히려 주님이신 하느님을 종으로 삼고,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 하느님께 자신을 섬기도록 강요하는 우상 숭배의 죄를 별다른 죄의식 없이 범하기 쉽습니다. 한편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으로 거짓 맹세를 들 수 있습니다.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의무입니다. … 맹세가 진실되고 정당할 때에, 맹세는 하느님의 진리에 대해 인간의 말이 지닌 관계를 밝혀 줍니다. 거짓 맹세는 거짓을 가장하려고 하느님을 내세우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151항). 하지만 맹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한다면 굳이 맹세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맹세는 그 거짓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가르치십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너희는 말 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4.37). 다시 믿음의 길을 걸어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는 두 번째 계명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마라.’는 명령과 동전의 양면을 이룹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는 두 번째 계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나는 경외한다. 나는 하느님의 존엄과 영광과 권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우리는 인간의 경험(인식)을 초월하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적 해석을 넘어서는, 아주 다른 하느님에 대해 어렴풋이 느낀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개념으로 고정시키는 것을 꺼린다. 우리는 하느님을 불가해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으로 우러러본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을 특정한 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한다”( 「인생을 떠받치는 열 개의 기둥」, 송안정 옮김, 21세기북스, 2010, 64-65쪽).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이제 우상 숭배의 길에서 벗어나 믿음의 길을 걸어요, 오직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모심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을 올바로 부름으로써, 온 삶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 상지종 베르나르도 - 의정부교구 신부. 의정부교구 제8지구장 겸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3월호, 상지종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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