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펀 사회교리] (64) 개 합니꺼? ① 왜 신부님들은 개고기를 즐겨 먹었을까? 아침부터 베드로가 얼굴을 찌푸린 것이 별로다 싶어서 백 신부가 농담을 던진다. “베드로씨, 이런 농담 들어봤습니까? 진도성당에 새로 부임한 신부님에게 지인들이 진돗개 한 마리 구해 달라는 전화를 해댔습니다. 그러던 중 주교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거, 김 신부 진돗개 한 마리 구해 줄 수 있나?’하시는 겁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개 구해달라는 전화를 하도 많이 받다보니 짜증이 난 신부님이, 그냥 욱하는 마음에 주교님께 ‘아니, 주교님도 개소리 하십니까!’라는 헛말이 나오고 말았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농담입니다.” “아이고, 신부님 오랜만에 농담 같은 농담 한 번 하셨네요. 하하.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께서는 개고기를 왜 그렇게 잘 드십니까? 지난 2014년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하셨을 때 동물 보호 단체에서 ‘교황님, 신부님들에게 개고기 그만 드시라고 해주세요!’라는 공개 청원을 할 정도였지 않습니까. 저 그때 창피해서 혼났습니다. 왜 그렇게 개고기를 잘 드세요? 참 신부님도 개 합니꺼?” 베드로 이야기에 심기가 불편해진 백 신부가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하자, 베드로가 움찔하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넣는다. “베드로씨, 거 뭐든지 오래되고 지속적으로 행해진 관습에는 다 연유가 있는 것입니다. 동물 복지에 대한 베드로씨의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게 신부님들을 한방에 매도하면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천주교회 역사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합니다. 선교사 없이 스스로 공부해 신앙을 터득하고, 자발적으로 중국까지 가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신앙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니 다른 나라 천주교와 비교할 때 특이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개고기 식용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왜 신부님들은 개고기를 즐겨 먹었을까요? 한국 천주교는 처음 시작부터 근 100년 동안 혹독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오랫동안 지하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이 박해시기에 교회의 가장 큰 축일인 부활절이 되면 산속에 숨어서 미사봉헌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잔치를 벌여야 할 텐데 산속에서 귀한 소나 돼지를 잡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옛날에는 집에서 키우던 개를 산속에서 잡아먹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 눈을 속일 것도 없이 산속에서 개 한 마리 잡아먹으러 가는 시늉하며 솥단지 이고 올라와서 미사 후에 잔치를 벌였던 것입니다. 그 기억을 간직한 우리네 신앙 선배님들께서 부활절이나 성모몽소승천 대축일이 되면 꼭 개 한 마리 잡아 잡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몸보신 한다고 개고기를 먹기보다는, 박해를 기억하는 옛 전통을 이어가는 일인 것입니다.” * 백남해 신부(요한 보스코·마산교구 사회복지국장) - 마산교구 소속으로 1992년 사제품을 받았다. 마산교구 사회사목 담당, 마산시장애인복지관장, 창원시진해종합사회복지관장, 정의평화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가톨릭신문, 2018년 4월 8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65) 개 합니꺼? ② 무엇이든 지나치면 폐해 생기기 마련 “개고기를 먹는 것이 단순한 몸보신이나 맛으로 먹는 것만은 아니었음을 아시겠지요? 물론 맛도 좋고 몸에도 좋다는 견해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견해를 요즘 와서 믿지 않습니다. 신부님들이 개고기를 많이 드시고, 신부님들이 개고기를 먹기 때문에 신자나 일반인들에게 개고기 식용에 관한 정당성을 부여할 소지가 있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특히 젊은 신부님들부터 개고기를 잘 안 먹습니다. 개고기 식용에 대한 신부님들의 생각이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부활이나 대축일을 축하하던 역사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지고 있는 것 또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개고기를 먹고 안 먹고를 떠나서 그 정신만은 살려야 할 텐데요.” 개고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침을 삼키고 심지어 마지막 말을 할 때는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백 신부의 모습에 베드로가 반신반의하며 묻는다. “신부님, 정말 요즘 개고기 안 드시는 것 맞죠? 혹시 독자들이 보고 있어서 거짓말 하시는 것 아니죠? 이거 들통 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하하, 베드로씨. 사람 곤란하게 왜 이러십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시지…. 그건 그렇고, 이제 우리도 잘 살게 되니까 개고기 아니라도 먹을 고기가 많아졌기에 성당에서도 개고기를 먹는 것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물복지’를 생각한다면 개고기뿐 아니라 육식을 최소화하면 좋겠습니다. 고기를 영 안 먹을 수는 없겠지만 너무 과도하게 먹는 것은 우리 몸과 지구 환경에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외로운 현대인에게 ‘반려동물’이 주는 위로는 매우 큽니다. 그만큼 동물에 대한 복지도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개나 고양이 또는 다른 반려동물들을 단순히 동물로 보기 보다는 또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분들이 엄청 많아졌습니다. 저 또한 집사로서 ‘뭉치’라는 거무죽죽한 고양이 한 마리를 모시고 삽니다.(키우는 게 아니고 모시는 게 정확합니다. 에휴~) 하지만 너무 과도한 동물 사랑 또한 경계해야겠습니다. 아직 세상에는 배고픈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나눔이 동물 때문에 가로막히거나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역사를 뒤져보면, 18세기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일어난 ‘고양이 대학살’에 대해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인쇄소 주인이 ‘그리스’라는 고양이를 애지중지 키웠는데, 노동자들이 그 고양이 보다 못한 취급을 받게 되면서 쌓인 불만이 폭발했답니다. 급기야 주인집 고양이 ‘그리스’뿐 아니라 애꿎은 길고양이까지 잡아다가 부부가 보는 앞에서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양이를 죽이는 것을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의 상징적 행동으로 표출한 것입니다. 인쇄공 중 한 명인 ‘콩타’라는 사람은 ‘주인들은 고양이를 사랑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고양이를 증오한다’라는 말까지 기록하였을 정도입니다. 무엇이든지 너무 지나치면 폐해가 있겠죠?” [가톨릭신문, 2018년 4월 15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66) 개 합니꺼? ③ 균형잡힌 동물복지 이루는 것이 중요 “거참, 신부님 말씀 듣다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뭐 깊은 뜻이 있고…. 참 어렵네요.” “그렇습니까? 길고양이 이야기 나왔으니 한마디 더 하면, 중세기 유럽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흑사병(페스트)이었습니다. 실제로 중세 유럽에서 7500만 명에서 2억 명 정도가 흑사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구수가 적었던 중세기를 생각해보면 엄청난 숫자입니다. 흑사병 원인균이 쥐를 통해서 전염된다는 것은 알 것입니다. 그런데 중세기에 왜 갑자기 쥐가 많아져서 사람들에게 흑사병을 옮겼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마녀사냥을 위해서 마녀의 부하인 길고양이를 대량으로 죽인 결과, 길고양이가 없어진 지역에서는 쥐들이 들끓었고 흑사병이 유행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 우습죠? 무고한 사람을 마녀라고 몰아서 죽인 이들에게 자연이 이렇게 복수할 줄이야.” “신기하네요.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력에 좋다고 뱀을 하도 많이 잡아먹는 바람에, 들쥐들이 많아져서 ‘쯔쯔가무시’가 유행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자연과 생태계는 균형이 잡혀야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죠. 우리 신앙도 하느님 안에서 균형이 잘 잡히면 좋겠습니다. 길고양이 이야기를 하면 노르웨이와 일본이 생각납니다. 없는 돈에 어렵게 신부님 몇 분들과 함께 노르웨이에 갔었는데요. 길가에서 편하게 누워 자는 길고양이를 보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도망갈 줄 알았는데 그냥 누워 자는 겁니다. 귀여워서 쓰다듬어 주니 기분 좋은지 고로롱거리면서 계속 자는 겁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이 안 되죠. 고양이의 나라라는 일본에서는 더 놀란 것이, 성당이나 신사를 방문하면 고양이 한두 마리쯤은 쪼르르 달려와서 제 바짓가랑이 사이를 지나다니며 부비거나 발 앞에 누워서 쓰다듬어 달라고 애교를 부립니다(물론 일본에서도 길고양이 때문에 주민 간에 갈등이 있고 살인까지 일어나긴 합니다). 길고양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태도가 어떠한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뭐 길고양이 한 마리 어떻게 대하느냐가 무어 그리 대수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있지만 우리와 어울리지 못하는 동물에 대한 적개심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징후입니다. 길고양이가 사람을 피해 도망가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공격 받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길고양이에 대한 공격성이 확대 표출되면, 노숙자에 대한 공격으로 바뀔 수도 있고, 이주노동자에 대한 공격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의 사회라면 사회적 약자들이 그냥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또는 아무 이유 없이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한갓 길고양이에게도 친절한 사회라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친절하겠습니까? 동물에 대한 복지가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너무 동물에 대한 복지만을 부르짖다가 하느님과 사람을 잊으면 안 됩니다.” <끝> [가톨릭신문, 2018년 4월 22일, 백남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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