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프란치스코 교황의 십계명 교리: 하느님의 사랑은 율법을 앞서며, 율법에 의미를 부여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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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8-09 | 조회수4,809 | 추천수1 | |
십계명에 관한 교리 : 하느님의 사랑은 율법을 앞서며, 율법에 의미를 부여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6월 27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십계명에 관한 교리 교육을 이어나갔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일반알현도 지난주 수요일처럼 진행됩니다. 바오로 6세 홀에는 더위를 피해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많은 환우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형 화면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며, 우리도 그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둘이 아닌 하나의 일반알현입니다. 바오로 6세 홀에 계시는 환우들에게 인사합시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계명이라기보다는 당신 백성들이 잘 걸어나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 가득한 말씀인 십계명에 대해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열 가지 말씀들(데칼로그 혹은 십계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 이러한 시작은 뒤에 이어지는 구체적인 십계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당신 자신과 해방에 대해 이러한 선포를 하셨습니까? 홍해를 건넌 다음에서야 시나이 산에 도착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먼저 구원하시고, 그런 다음 신뢰를 요구하십니다. 곧, 십계명은 하느님의 관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시기 전에 결코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구원하시고, 먼저 주시고, 그런 뒤에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첫 번째 선언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소속이 있고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외부인이 아니라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십계명 전체를 밝혀주며, 그리스도인 행동의 비밀을 드러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으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우리의 일이 자주 실패하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어디로 도착합니까? 자기 자신에게 도착합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태도에 대해서 사람들은 농담조로 말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고, 자기 자신과 있고, 자신을 위해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서 나와서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보다 관대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의 응답입니다. 오직 “의무”만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경험이 없다고 투덜댑니다. “나는 이것, 저것, 그것을 해야해 (…)”라고 투덜댑니다. 오직 의무만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뭔가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이 의무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이 의무의 기초는 먼저 내어 주시고 그 다음에 명령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관계에 우선해서 율법을 두는 것은 믿음의 여정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해방(자유)이 아니라 의무, 책임, 일관성에서 출발한다면 한 젊은이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해방의 여정입니다! 십계명은 우리를 이기심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성은 의지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들이고 사랑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먼저 홍해가 있고, 그 다음에 시나이 산이 있습니다. 구원이 먼저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홍해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런 뒤에 시나이 산에서 (백성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은 이 일이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 구원 받았기 때문에 행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감사는 성령의 방문을 받은 마음의 특징입니다. 하느님께 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께로부터 받은 선물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 바실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망각하지 않는 사람은 선한 덕과 모든 정의로운 일을 지향합니다”(「짧은 규칙서」, 56항).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갑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 주신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하는 것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우리의 천상 아버지께서는 너무나 관대하십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작은 연습을 제안합니다. 잠시 침묵 중에 여러분 각자의 마음 안에서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이 좋은 일들을 하셨나? 침묵 중에 각자 대답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이 좋은 일들을 하셨나?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해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좋은 일들을 하시며 우리를 해방시켜줍니다.
그러나 아직도 누군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데 대한 참된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 바라보고, 의무감만 느끼고, 자녀가 아닌 종의 영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 백성이 한 것처럼 하면 됩니다. 탈출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그러자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탈출 2,23-25).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생각하십니다.
데칼로그(열 가지 말씀들), 곧 십계명의 서두에 명시된 하느님의 해방시키시는 행동은 백성들의 그 신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되지 못하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저를 가엾게 여기소서. 주님 저에게 기쁨을 조금 주십시오.” 이것은 도움을 청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이기심과 죄와 노예의 사슬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청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이 부르짖음은 중요합니다. 이 외침은 기도입니다. 이 외침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억압받고 해방되지 않은 것에 대한 인식입니다. 우리 영혼 안에는 해방되지 않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저를 구하소서. 저를 도와 주소서. 저를 자유롭게 해주소서.” 이는 주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묶고 있는 사슬을 끊을 수 있고 끊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이 부르짖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억눌린 채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삶으로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우리에게 무한히 주신 당신께 기쁨으로 순명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감사하면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축복받으소서.
[바티칸 뉴스, 2018년 6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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