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프란치스코 교황의 십계명 교리: 휴식의 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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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9-19 | 조회수5,831 | 추천수0 | |
십계명에 관한 교리 : 휴식의 날 “주일은 자신의 삶의 역사와 평화를 이루는 날입니다”
휴식은 일상의 삶을 즐기는 유흥이나 휴가로 탈출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축복하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주일은 자신의 삶과 평화를 이루는 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5일 수요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알현을 통해 휴식에 관한 계명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데칼로그(Decalogo, 열 가지 말씀들, 십계명)의 여정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휴식의 날에 대한 계명으로 인도합니다. (이 계명은) 실천하기 쉬운 계명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휴식을 취한다는 것은 정말로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짓 휴식과 진정한 휴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현대 사회는 즐김(엔터테인먼트)과 휴가에 목말라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일은 매우 활발하며, 광고는 이상적인 세상을 마치 모두가 즐기는 큰 놀이터로 그려냅니다. 오늘날의 지배적인 삶의 개념은 활동과 헌신에 중심을 두지 않고, 회피(일탈)에 중심을 둡니다. 즐기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돈을 법니다. 그 모델은 바로 다양하고 넉넉한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성공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진정한) 휴식이 아닙니다. 현실로부터의 도피이며 소외감인 유흥에 의해 무감각해진 삶에 대한 불만족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인류는 오늘날처럼 많은 휴식을 취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처럼 공허함을 경험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즐기고, 밖으로 나가고, 크루즈 여행을 하고, 많은 여행을 하는 것 외에도 많은 것들이 여러분에게 마음의 충만함을 주지 못합니다. 곧, 그것들은 여러분에게 (진정한) 휴식을 주지 않습니다.
십계명의 말씀은 휴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빛을 제시하면서, 문제의 핵심을 찾아 얻습니다. 이 계명에는 특유의 요소가 있습니다. 곧, 동기 부여를 제공합니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의 휴식은 정확한 동기를 갖고 있습니다.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 20,11).
이는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를 마치시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라고 하신 말씀으로 되돌아 갑니다. 이로써 당신께서 창조하신 것에 대한 하느님의 기쁨인 휴식의 날이 시작됩니다. 이 날은 묵상과 축복의 날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명에 따르는 휴식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회피의 때가 아닌 바로 묵상의 때, 찬미의 때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서의) 휴식에 반해 십계명은 현실에 대한 축복으로서의 휴식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날의 중심, 곧 주일의 중심은 “감사를 드린다”는 의미의 성찬례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생명과 자비와 모든 은총의 주님께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주일은 다른 날들을 지우기 위한 날이 아닙니다. 다른 날들을 기억하고 축복하는 날이며, 삶과 평화를 이루는 날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과의) 삶과 평화롭게 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주일은, 삶이 쉽지 않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소중하고 귀중하다고 말하면서 삶과 평화를 이루는 날입니다.
참된 휴식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그러나 저주와 그 매력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요구합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83항 참조). 불만의 이유를 강조하면서 불행에 마음을 굽히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축복과 기쁨은 마음의 성숙한 활동인 선을 향한 개방성을 수반합니다. 선은 사랑스럽고,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선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선택하는 것이고 강요할 수 없으며 우연히 발견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마음의 쓰디쓴 상처로부터 멀어지면서, 자신이 도망치고자 하는 것과 평화를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의 역사와 받아 들일 수 없는 사실들과 자신의 삶의 어려운 부분들과 화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여러분의 역사와 화해하셨습니까?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의 역사와 화해했는가? 사실, 진정한 평화는 자신의 역사를 바꾸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향락가들과 쾌락주의자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평온함으로 우리를 위로해준 많은 병든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함을 아는 행복으로 작은 은총에도 기뻐하는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신명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9). 이 선택은 동정 마리아의 “그대로 제게 이루어 지소서(fiat)”이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발자취에 올려놓는 성령을 향한 개방입니다. 성령께서는 가장 극적인 순간에 아버지께 자신을 바치시며, 부활로 인도하는 길을 취하십니다.
인생은 언제 아름다워집니까? 우리의 역사가 어떠하든지 간에 인생에 대해 잘 생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며, 거룩한 생각이 진정한 휴식을 시작하면서 불만의 내면의 벽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의심의 선물이 길을 걷기 시작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마음을 열 때 인생은 아름답게 됩니다. 시편이 말하는 “내 영혼이 오직 하느님을 향해 말없이 기다립니다”(시편 62,3)라는 이 구절이 진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인생은 아름다워집니다. 시편의 이 구절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내 영혼이 오직 하느님을 향해 말없이 기다립니다.”
[바티칸 뉴스, 2018년 9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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