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따라 걷기] 아홉째 계명 :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존중의 길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지닌 무엇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온전히 자유이고 당신을 소유하지 않으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온전히 당신일 수 있게 당신을 탐내지 않으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탐낼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당신은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니까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더욱 당신일 수 있게 당신 곁에서 함께하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영혼과 육신과 관계와 당신의 모든 것을 존중하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지닌 어느 무엇도 당신에게서 빼앗지 않으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당신을 사랑하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기에 사랑합니다 당신이 당신일 수 있게 사랑합니다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우리에게 아홉째 계명은 조금은 의아하게 다가옵니다.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그렇다면 남의 남편은 탐내도 되는가?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왜 하필이면 ‘아내’라고 명시했을까 하는 물음을 어리석게도 지우기 쉽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아홉째 계명과 열째 계명으로 나누는 십계명의 마지막 두 계명을 탈출기에서는 하나로 규정합니다.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20,17). 결혼한 여자(아내)를 남편의 소유물로 간주하던 가부장적 시대라는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해석한다면, 아홉째 계명의 곁점은 ‘남의 아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탐냄, 탐내는 마음’에 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탐욕은 크게 ‘사람에 대한 탐욕’과 ‘유무형의 사물에 대한 탐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아홉째 계명은 ‘사람에 대한 탐욕’을, 그리고 열째 계명은 ‘유무형의 사물에 대한 탐욕’을 금합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자신을 소유의 노예로 만들어 자신뿐만 아니라 탐욕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고유한 존재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과 모든 이를 존중할 수 없습니다. 탐냄, 끝없이 더 가지려는 마음 ‘탐냄’, ‘탐심’, ‘탐욕’은 ‘무엇을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소유에 대한 집착입니다. “탐냄은 굴레 풀린 욕망이라는 정신적 질병이다. 이는 한껏 만족하고자 하는, 그러고 나서도 더 갖고자 하는 결핍이다. 이는 끊임없이 오감의 만족을 요구하는 결핍이다. 이는 자아와 삶과 필요한 것들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무력함이다. 이는 광분하는 자기 강화요, 철저히 자아도취에 빠진 삶이다”(조안 키티스터, 「십계명 마음의 법」, 성찬성 옮김, 성바오로, 162-163쪽). ‘탐냄’은 구체적인 행위 이전의 지향이나 의지입니다. 사람의 성(性)과 관련하여 “간음하지 마라.”는 여섯째 계명이 우선하여 구체적인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라면, 아홉째 계명은 좀 더 포괄적으로 마음마저 다스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일곱째 계명, “도둑질을 하지 마라.”와 열째 계명,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 소유될 수 없는 존엄한 존재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께서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시편 33,12)시편 저자는 하느님께서 소유하신 사람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은 오직 하느님께만 소유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려는 마음이 사람에 대한 ‘탐냄’입니다. 아홉째 계명은 ‘사람에 대한 탐냄’ 중에 무엇보다도 먼저 이성에 대해 느끼는 음란하고 방탕한 욕망, 곧 음욕을 올곧게 다스릴 것을 명합니다. 이성을 사랑하고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부에게만 허락된 거룩한 성적인 욕구를 쾌락의 도구로 삼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홉째 계명의 의미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느끼는 것을, 어떤 여성에게 호감을 갖는 것을, 그녀에게 매혹을 느끼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 여성을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나는 그녀의 생활 영역, 그녀의 친구, 그녀의 남편을 인정한다. 나는 그녀를 나에게 얽매지 않고 대화하면서 그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나는 그녀를 자유롭게 한다. 나는 그녀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율적인 유일무이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존중한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 속하지 않고 그녀의 남편, 친구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안다”(안젤름 그륀, 「인생을 떠받치는 열 개의 기둥」, 송안정 옮김, 21세기북스, 166-167쪽). 사람을 상품화하는 시대에 맞서 사람은 소유할 수 있는 사물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그 자체로 자유이고 존엄합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 안에서 사람들은 마치 사고팔 수 있는 물건처럼, 마음대로 소유하거나 처분할 수 있는 상품처럼 다루어집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거룩하고 순결한 성(性)이 상품화되어 싸구려 물건처럼 취급되고, 존엄한 사람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안 키티스터 수녀는 음욕을 다만 전통적인 의미에 한정시키기보다는 사람을 상품화하고 소유하려는 모든 시도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홉째 계명은 “음욕을, 단순히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선한 이익을 주는 것보다 더 많이 갖고자 하는 탐욕스러운 욕구를 다루고 있다. … 포르노는 음욕이다. 남녀를 성적으로 이용하는 착취는 음욕이다. 사람을 유형별로, 소모시켜도 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는 짓은 음욕이다. 여자를 고용하여 남자와 동일한 일을 시키면서 임금을 적게 주는 짓은 음욕이다. 나이 든 사람이 적정한 연금을 수령하기 직전에 ‘조기 퇴출시키는’ 짓은 음욕이다. 경력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기력을 이용하고자 숙련된 사람들보다 어린 사람을 고용하는 짓은 음욕이다”(「십계명 마음의 법」, 168-169쪽). 다시 존중의 길을 걸어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의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크고 작은 각자의 권력으로 끝없이 다른 이를 소유하라는 세상의 유혹을 거슬러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사람이 참으로 존엄한 사람임을 선포하는 존중의 길을 걸어요, 당신께서 만나시던 사람들을 존중함으로써 그들이 그들일 수 있게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 상지종 베르나르도 - 의정부교구 신부. 교구 제8지구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10월호, 상지종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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