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5. 하느님 계시의 전달(74~100항)
자녀를 보면 부모를 알듯이 교회는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계시(자기 자신을 드러냄)는 관계맺음을 목적으로 합니다.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 관계 맺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생명을 내어주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먼저 표현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완전한 사랑의 계시는 없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것보다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계시 차원에서는 마치 자녀를 위해 고생한 흔적이 다 지워진 부모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손에 있는 굳은살을 보며 그 사랑을 믿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며 하느님 사랑을 믿게 됩니다. 그렇다고 계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돌아가셔도 그 부모를 증거 해 줄 자녀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사랑의 가장 완전한 계시가 그 사랑으로 자라난 자녀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완전한 계시는 그분으로부터 태어난 교회입니다.(75항 참조) 자녀가 부모사랑을 몸에 체득하고 있듯, 교회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진리를 세포 하나하나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이 체득한 진리를 ‘글로 쓰이지 않은 가르침’과 ‘글로 쓰인 가르침’, 두 형태로 전합니다.(76항 참조) 글로 쓰이지 않은 것을 ‘성전’(聖傳)이라 하고 글로 쓰인 대표적인 것을 ‘성경’(聖經)이라 합니다. 이 둘은 같은 계시를 전하고 있지만 성경보단 성전이 더 우위에 있습니다. 부모의 가르침의 정점은 부모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득한 자녀 자신이지 자녀가 부모에 대해 쓴 글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녀가 부모에 대해 글로 썼다고 하더라도 그 글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는 주체는 그 글을 쓴 자녀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하느님의 자녀인 교회만이 그 해석의 유일한 권위를 지닙니다.(85항 참조) 연애편지는 연애하는 당사자들만이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듯, 성령의 감도로 쓰인 성경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만이 온전히 해석 가능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앙인들은 교회 전체가 지닌 성령의 완전함을 지니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각자 다른 불완전한 해석이 나오게 되는데,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면 개신교처럼 수백 개, 수천 개의 종파로 나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개별적으로 내려주시지 않고, 교회 모든 구성원이 모였을 때 주셨습니다. 이는 공동체의 영성이 개인들의 영성보다 항상 크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의 말을 듣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루카 10,16 참조) 부모가 자녀에게 교육을 할 때 그 나이에 맞는 수준의 교육을 하듯, 교회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수준별로 나누어 전합니다. 믿을 교리들도 그 중요도에 따라 서열 또는 위계를 세운 것입니다.(90항 참조) 사도신경은 구원에 직결되는 교리이지만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온전히 해석하고, 진리에 서열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은 교회가 성령의 힘으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진리인 ‘성전’(거룩한 전승)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83항 참조) 자녀만이 부모를 온전히 알고 전해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 교회만이 완전한 해석자라고는 하지만 모든 신자들 또한 불완전하게나마 그 해석에 참여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91항 참조) 친 자식이 아니더라도 어떤 부모의 굳은 살 박힌 손을 보면 감동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을 받은 신앙인들도 부족하게나마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를 ‘신앙 감각’이라 부릅니다. 모든 신자들의 신앙 감각이 일치한다면 그 믿음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92항 참조) 모두가 십자가에 감동한다면 그 모두 안에 계신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을 통하여 감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신앙수준이 곧 계시의 이해 수준과 같습니다.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를 더 잘 이해하게 되듯, 계시에 대한 이해는 교회의 신앙과 함께 성장합니다.(94항 참조) [가톨릭신문, 2019년 1월 27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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