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 처음입니다만] (12) ‘거룩하시도다’를 왜 세 번씩 하나요
하느님 거룩함 상징하는 숫자, 전례에 쓰이다 - 미사 시작과 함께 참회 예식 때 “제 탓이오”를 세 번 반복하며 오른손으로 자기 가슴을 친다. 이는 자기 잘못에 대한 아픔과 뉘우침을 표시하는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나처음: 몇 차례 미사에 참여하다 보니 조금씩 말이 귀에 들리기 시작하네요. 그런데 이상하게 몇몇 기도 말은 꼭 세 번씩 반복하더라고요. 아주 중요한 대목인가 봐요. 지금도 기억에 나는데 “거룩하시도다”와 “제 탓이오”를 세 번씩 반복하고, “제 탓이오”라고 할 때는 손으로 가슴을 치더라고요. 왜 그러는 건가요? 조언해: 몰랐니? 영성체 모시기 전 소화가 잘되라고 그러는 거~는 뻥이야! 정말 나도 왜 그럴까 궁금해지네. 그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읊기만 했나 봐. 신부님, 저도 궁금해요.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각각 죄를 통회하고 찬미를 하기 위해 세 번 기도하는 게 아닌가요? 라파엘 신부: 모든 전례와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에서 ‘3’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연관 지어 묵상하고 행하려 하는 것은 칭찬할만한 모범이 된 습관이라 생각해. 그 의미가 꼭 맞지 않아도 모든 걸 하느님과 연관 지어 그분 뜻을 헤아리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언해를 칭찬해 주고 싶어. 신앙인으로 참 잘살고 있는 것 같아. 전례에서 숫자 ‘3’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에 드러난 숫자의 속뜻을 알아야 한단다. 성경에서 ‘3’은 사물과 시간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침을 가리켜. 가장 대표적인 예가 언해가 말했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지. 그래서 성경에서 ‘3’은 ‘하느님의 세계’를 가리킨단다. 하느님께서 가장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 하느님”(이사 6,3)이라며 천사들이 찬미하지. 예수님께서도 세 차례 유혹을 받으시고, 무덤에 사흘 동안 묻혀 계시다가 부활하시지. 이렇게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수가 전례에 들어오게 된 것이란다. 전례에서 숫자 ‘3’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환호하고 간청할 때 사용되고 있단다. 먼저 미사 시작과 함께 참회 예식 때 “제 탓이오”를 세 번 반복하며 오른손으로 자기 가슴을 친단다. 이는 자기 잘못에 대한 아픔과 뉘우침을 표시하는 거란다. 또 ‘자비송’이라고 하는 “자비를 베푸소서”를 세 번 외친단다. 짧지만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간청하는 아주 훌륭한 기도란다. 이 기도의 대상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지. 첫 번째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을 용서하러 오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는 루카 복음 4장 18-19절의 말씀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소경들에게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를 풀어주시는 주님께 자비를 청한단다. 두 번째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은 마태오 복음 9장 13절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이란다. 또 마지막 세 번째 기도 “성부 오른편에 중개자로 계신 주님, …”은 요한 복음 16장 26-28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상기시켜주는 기도란다. 이처럼 자비송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환호라고 설명할 수 있지. 파스카성야에 복음 환호송 ‘알렐루야’도 세 번 외치지. 알렐루야는 히브리 말 ‘할흘루야’를 그대로 음역한 전례 환호란다. “너희는 주님을 찬양하라”는 뜻이란다. 알렐루야는 사순시기를 제외하고는 항상 노래해. 성찬 예식 감사 기도 끝 부분에 바치는 “거룩하시도다”도 세 번 반복하는데, 감사송인 이 부분은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회중이 하늘의 천사와 성인들과 결합해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는 환호란다. 마지막으로, 영성체 예식 때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하는 평화의 찬가도 세 번 반복한단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 바치는 이 환호는 우리가 모실 성체와 성혈이 단순한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파스카의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주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기도야. 이처럼 미사 중에 참회 예식과 말씀 전례, 성찬 예식과 영성체 예식도 하느님의 자비와 거룩함을 찬미하기 위해 세 번씩 환호를 외친단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5월 19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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