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8. 유형의 세계(「가톨릭 교회 교리서」 337~354항)
안식일의 참 의미는 ‘창조의 완성’ 천연두로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흉터자국을 가친 채 도시로 이사 온 그레이스는 친구들에게 ‘괴물’이란 놀림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상처 받아 울고 있는 그레이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네가 어렸을 적에 천연두라는 큰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단다. 그 병은 네 오빠와 동생의 생명을 빼앗아갔지. 이웃의 많은 아이들도 죽었단다. 하지만 하느님이 너만은 살려주셨단다. 네 얼굴에 생긴 상처는 하느님께서 네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표징이란다.” 그레이스는 엄마의 말을 믿었고 누구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녀는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였고 잘생긴 남학생과 결혼하여 미국 하원의원까지 지냈다고 합니다. 부모는 하느님 창조사업의 협조자입니다. 세상의 작은 창조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는 낳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높은 자존감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자녀는 그 자존감대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은 부모가 자녀에게 희생하는 것만큼 높아집니다. 이것이 자녀를 창조하는 부모의 역할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그 존재를 부여받았습니다.(338항 참조) 창조는 덜 중요한 것들로부터 시작하여 더 완전한 것으로 6일 동안 진행되었습니다.(342항 참조) 그리고 가장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창조 업적의 절정입니다.”(343항) 그런데 창조는 6일이 끝이 아닙니다. 7일이 끝입니다. 제7일을 ‘안식일’이라 합니다. 하느님은 “이렛날에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쉬셨고”, “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창세 2,1-3) ‘하느님께서 힘드셔서 쉬시다니?’ 이 말은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 십자가 위에서 피를 쏟으신 날이 여섯째 날이고 토요일, 안식일 날 무덤에서 쉬신 것과 같습니다. 목숨을 내어놓기 전까지는 창조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6·25전쟁 추운 겨울 어느 날, 미군들은 한 나무 밑에서 아기를 자기 겉옷으로 싸고는 자신은 싸늘하게 죽어있는 어머니를 발견합니다. 한 미군이 아기를 자신의 나라로 데려가 키웠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컸을 때 어머니를 묻어놓은 그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청년이 된 그 아들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무덤 위에 덮어주며 “어머니, 그 때 얼마나 추우셨어요?”라며 무덤을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이 어머니가 무덤 속에서 쉬고 있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생명을 주기 전까지는 완전히 창조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받았을 때 비로소 자녀도 생명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생명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에야 자신의 창조까지도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생명을 내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의 창조도 완성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이런 수준까지 창조하시기 위해 아직도 창조사업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완전한 창조자요, 창조된 인간의 모델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위해 안식일이라는 무덤에 들어가심으로써 창조의 완성을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이 새로운 창조의 찬란함은 첫 번째 창조를 능가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을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창조함이 아담을 창조한 첫 창조를 능가하는 것입니다.(349항 참조) 인간이 하느님 창조에 협력한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창조에 협력하지 못하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히브 3,11) 창조자 하느님의 안식은 하나의 ‘법’입니다. 6일의 창조를 거치지 않으면 제7일의 안식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일곱째 날에 대한 믿음이 ‘여덟째 날’, 즉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줍니다. 정리하자면, 6일의 창조 여정은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기 위해 가야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안식일은 십자가를 거친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죽음의 영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히브 4,3)라고 말합니다. 하느님 창조에 참여하는 길만이 안식에 이르는 길입니다.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창조자의 안식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7월 14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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