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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32: 낙원의 인간(374~384항)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8-11 조회수1,878 추천수0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32. 낙원의 인간(「가톨릭 교회 교리서」 374~384항)


삼위일체 관계를 깨는 삼구(三仇)

 

 

영화 ‘박하사탕’(2000)은 한 중년 남자가 기차에 몸을 던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내용은 점점 과거로 돌아가며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명해줍니다. 그 이유는 어린이처럼 순수했던 주인공이 ‘돈과 욕망과 권력’에 대한 욕구로 찌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그의 살아온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산 사람이라고 다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순수했을 때의 주인공은 박하사탕을 주던 한 여인의 진실한 사랑에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행복의 맛을 잃고 세상이 주는 쾌락을 쫓았습니다. 박하사탕의 작은 달콤함을 버리고 돈과 쾌락과 명예를 좇은 것은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박하사탕이 군홧발에 짓밟히는 순간 우리는 그가 참 행복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렸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학생을 고문하는 인정사정없는 경찰관, 돈만 아는 사업가, 바람피우는 남편이 될 것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 왜 영화 첫 장면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며 기차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알게 됩니다. 주인공이 다시 되돌려 받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시간적인 과거가 아니라 그 과거에 가졌던 어린이처럼 ‘순수했던 마음’입니다. 

 

어린이는 ‘부모만’ 바랍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갈수록 부모보다는 ‘부모가 줄 수 있는 것’을 더 바라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 것인 선악과를 더 바라게 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청하는 탕자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들로 행복을 추구하려 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느님과 등지게 만드는 세속적 행복을 세 가지로 구분해 가르쳐왔습니다. 이를 전통적으로 ‘삼구’(三仇, 세 가지 원수)라 불렀습니다.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377항)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이 세 가지의 욕망이 곧 ‘삼구’입니다. 삼구는 인간이 다시 에덴동산으로 복귀하기 위해 성령의 힘으로 싸워 이겨야하는 원수들입니다. 

 

‘관능적 쾌락’이란 ‘육체의 욕망’을 의미하고,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이란 ‘소유욕’을 뜻하며, ‘반이성적 자기주장’이란 자기만 옳다고 믿는 ‘교만’을 말합니다. 그래서 삼구는 ‘세속(돈), 육신(성욕), 마귀(판단)’입니다. 이 세 욕구가 하느님 존재 자체를 바라는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바랍니다. 이 욕망이 있으면 하느님을 섬겨도 그런 것들을 주셔야만 좋아할 수 있는 존재인 금송아지로 섬기게 됩니다. 

 

이 세 욕구는 뱀에게서 나옵니다. 뱀은 ‘자아’이고 그 뱀이 자아내는 욕구가 삼구입니다. 뱀은 ‘하느님처럼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어 금지된 열매가 ‘먹기에 좋고’ ‘탐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창세 3,6 참조) 여기서 ‘먹기에 좋겠다’는 욕망은 ‘육체의 욕망’ (관능적 쾌락)이고, ‘탐스럽게 보였다’는 것은 ‘소유의 욕망’(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입니다. 이 두 욕망은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는 ‘교만’(반이성적 자기주장)에서 기인합니다. 

 

자아의 욕망과 타협하면 삼구의 욕구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태초부터 누리던 ‘원초적인 거룩함’(375항), ‘원초적인 의로움’(376항)을 잃습니다. 거룩함을 잃는 것은 하느님과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이고, 의로움을 잃는 것은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는 떳떳함을 잃는 것입니다. 

 

뱀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에 관심을 쏟게 만듭니다. 혹 우리도 성당에 나올 때 하느님만을 원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을 더 바라며 나오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합니다. 그분과의 ‘친교 자체’에 기쁨을 두지 않는다면 그분도 우리와의 친교 자체에 기쁨을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8월 11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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