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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51: 평화를 이루어가는 신앙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29 조회수1,777 추천수0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51. 평화를 이루어가는 신앙인(「간추린 사회교리」 552항)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랑의 실천 ‘사회 참여’

 

 

마리아: 신부님, 지난 11월 26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사회적 약자를 위한 미사’에 갔는데, 홍콩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미사였어요. 그런데 강론하신 신부님이, “홍콩에 대한 관심은 정치가 아닌 절망에 손 내미는 일”이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매우 공감이 갔어요.

 

이 신부: 어떤 부분이 공감이 가셨나요?

 

마리아: 저는 교회가 정치·사회 문제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어려운 이웃마저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것은 신부님 말씀처럼 정치적 활동이기 이전에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행동이잖아요. 물론 지금도 고민이에요. 정치가 무엇인지, 또 우리는 어떻게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는지 말이에요.

 

 

정교분리

 

1791년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인류역사상 최초로 정교분리는 합법적 제도가 됩니다. 이는 당시 유럽의 반(反)성직 사조와 종교자유의 갈망에서 비롯됐습니다. 지금도 정교일치 국가도 있지만 미국과 프랑스, 호주, 일본, 필리핀과 칠레 등 많은 국가들이 정교분리 국가이며 한국도 그러합니다.(헌법 제20조) 그런데 1972년 유신헌법 제정과 군사독재에 반대해 종교인들이 사회 참여에 뛰어들 때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정교분리에 위반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교인이 정치나 사회문제에 참여함이 위법하다는 현행법 조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가톨릭교회는 정치활동 참여로 인한 내부 문제를 염려해서 사제들에 대해 현행 교회법상 노동조합 가입과 정당활동 등 협의적 정치활동은 제한합니다.(교회법 285조 2항, 287조 2항) 또한 평신도들도 정당의 지도직을 맡은 사람이 교회의 단체장을 할 수 없다고 명시합니다.(교회법 317조 4항) 그러나 광의적 정치활동은 어떨까요? 가령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거나, 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할까요? 그것은 제한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이 미사나 전례 중에 정치적 발언을 자유로이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며 사제는 자신의 견해보다 교회의 가르침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사와 전례 외의 곳에서 참여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헌법은 국민의 정치활동과 표현의 자유를 기본권으로서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정교분리의 목적 - 국가와 교회의 건강한 공존

 

정교분리는 개인의 인간 존엄에 근거해 종교자유를 지향하며, 국가는 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정교분리를 명확히 하면서도 국가와 정치의 건강한 역할에 기여해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정교분리가 지향하는 것은 건강한 국가와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정교분리가 국가에 대한 종교의 비판적인 기능을 상실한 상태는 아닙니다. 더욱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정치·사회적 현안에 무관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일 심각하게 인권과 평화에 해를 끼치는 일이라면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조직이 모든 교구의 정의평화위원회입니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며(성 요한 23세 교황 회칙 「지상의 평화」) 인간소외와 불평등을 야기하는 경제, 정치, 사회의 모든 요소들을 개선하는 것이 참된 평화라고 가르칩니다.(성 바오로 6세 교황 회칙 「민족들의 발전」)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적 가치를 목적으로 봉사와 공동선의 증진을 위해 더욱더 사회 문제에 참여해야 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552항)

 

 

책임감 있는 목자로서 교회의 진정한 모습

 

2000년 3월 12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선언을 통해, 2011년 10월 27일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은 평화를 위한 종교지도자 모임에서, 각각 과거 가톨릭교회의 역사적 과오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던 지난 2월 20일,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께서도 3·1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를 통해 일제 식민지배 당시 천주교의 태도를 반성하고 평화를 이루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행보로 교회의 권위가 더 높아졌습니다.

 

약한 이들 편에서 그들을 돕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자는 교회 본연의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섬기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피어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권위와 제도, 체면을 버리고 겸손, 사랑을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도 교회가 정교분리를 구실로 정의와 사랑의 실천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반성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점점 더 복잡해지고 각박해지는 이 시대, 진정으로 책임 있는 교회의 모습이 요청됩니다. 정치타령이 아니라 봉사와 섬김을 최우선으로 어려운 이웃의 아픔을 내 것으로 생각하고, 미쳐 못다 한 사랑을 위해 애쓰는, 책임감 있는 신앙인을 하느님께서 바라실 것입니다. 그렇게 회심하는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평화가 지상에 꽃필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것인 모든 사람의 존엄을 증진하는 일은 교회와 그 안에 사는 평신도들이 인류 가족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봉사의 근본 임무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핵심적이고도 통합적인 임무이다.”(「간추린사회교리」 552항)

 

[가톨릭신문, 2020년 1월 1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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