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89. 어린이, 청소년, 청년과 함께! "들어주고 동반하고 함께 걷고”(「간추린 사회교리」 5항)
아이들을 교회로 초대하고 싶다면 ‘사랑의 언어’로 2013년 3월 호르헤 추기경은 마침내 교황에 뽑혔어요. 그는 교황이 되자 맨 처음, 죄를 지은 청년들을 찾아가 더러운 발을 깨끗이 씻어주고 축복했어요. “교황님 전 천주교 안 믿는데요?”, “상관없단다. 모두 하느님의 자녀니까”. 사람들은 교황의 넓은 사랑에 감동했어요. (장경원 글, 루인 그림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 교황 프란치스코」 중) 꿈나무들의 미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때문에 얼마나 힘드십니까? 너나 할 것 없이 힘들고 지쳤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미래 꿈나무들이 걱정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등교수업 제한과 부족한 역량의 원격수업 현실에서 돌봄과 가사 노동마저 위태로워지고, 청소년 시설들도 문을 닫는 현실은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돌봄 휴가 확대나 보육료 지원, 긴급 돌봄 서비스가 소외계층 어린이·청소년에게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청년들의 곤궁한 처지는 그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친구와 학교 잃고 코로나19에 멍들고 부서진 현실은 최근 10~30대 사망원인 1순위가 자살이라는 통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집에 있으라고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른과 사회가 줄 수 있는 대안은 뭘까요? 지난달 인천에서 엄마가 안 계신 집에서 어린 아이들이 화재사고를 당한 사연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처럼 시급한 민생현안에도 협력과 정책 창출을 외면한 채 정쟁 속에서 대립만 일삼는 정치권도 매우 아쉽습니다.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가톨릭교회도 이런 상황이 매우 뼈아픕니다. 청소년 사목을 되짚어 보자는 의견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십 년간 변화되지 않은 주일학교 시스템의 한계와 그로 인해 성당을 찾는 청소년들 발길이 줄어든 것은 코로나19 전부터 진행됐습니다. 청소년·청년 분야는 교회 관심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목의 가장 약한 고리였습니다. 청소년 사목에 대한 실태 조사, 인격적 만남과 동반이 중심이 된 교육 전개, 온라인 신앙 콘텐츠 개발과 교리교사 양성 등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핵심은 그들과 함께 동반하며 친구가 돼 주는 것입니다. 그들과 같이 소통하며 격려와 위로, 공감을 해주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저도 보좌신부 시절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좀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시간을 내어 함께하고 고민이나 이야기를 들어 줬어야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도 은연중에 그들을 친구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훈계가 필요한 어린학생으로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다가감과 성장(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210항) 복음과 사회교리 본질은 ‘사랑’이며 이는 사람과 세상에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함이라 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5항, 566항) 인권과 공동선, 신앙과 도덕 가치 수호와 증진을 통해 평화를 이루고자 합니다. 그 중에서도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관심은 핵심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5항) 지금도 많은 어린이·청소년들이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과 함께 대화하고 소통하며 관계 맺어야 합니다. 믿음을 갖고 신뢰하며 도와주고 손잡아 줘야 합니다. 경청, 존중, 동반, 공동체를 통해 ‘함께 한다’는 표현을 실천해야 합니다. 저는 그 방법으로 신앙과 윤리 영역에서 어른들이 자신의 삶을 회복함을 제안합니다. 자녀들은 열심히 성당 다니길 바라면서 어른들이 그렇지 못한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때, 스스로도 변화하고 성장하며 급기야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이 실천되지 않을까요?(신명 28,50; 루카 18,16) “젊은이들에게는 개종을 위한 설교가 아니라 사랑의 문법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납득하는 언어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의 언어, 젊은이들 때문에 젊은이들을 위해서 거기 있어 주는 사람의 언어, 자신의 온갖 한계와 나약함에도 충실히 신앙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언어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211항) [가톨릭신문, 2020년 10월 11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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