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칼럼] 내가 짓지 않았으나 짊어진 죄 20대 초반의 학생들,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과 신앙이 없는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마치 외국어를 번역하는 일과 같다. 수십 년 차이도 아득한데 멀게는 수천 년 전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신화적 상상력과 삶의 경험이 축적된 신학을, 21세기 과학기술 문명과 정보화 사회의 생활 방식과 경험에 닿을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신학이 담보하고 있는 실존적 경험의 깊이다. 얼핏 건조하고 엄격한 신학 언어의 표피 아래 녹아 있는 절망과 희망, 욕망과 증오, 두려움과 떨림, 외로움과 열망, 죄의식과 용서, 이런 원초적인 인간 경험의 서사는 시공간을 관통하며 학생들의 경험과 조율되어 그들의 삶에 신선한 파장을 불러오곤 한다. 그러므로 신학 교육은 교리로 화석화되어 있는 개념 안쪽의 역사적 배경과 사목적 고민들을 길어 올려 오늘 우리의 삶과 조율하는 작업이 늘 동반되어야 한다. 수많은 신학 개념들 중, 학생들이 예외 없이 난감함과 거부감을 표현하는 것 중 하나가 원죄에 관한 교리다. 하긴, 학생들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신자들에게도 원죄론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교리다. 우선 교리서에 나온 원죄를 살펴보자. “아담과 하와가 유혹자에게 굴복함으로써 지은 죄는 개인의 죄이지만, 그 죄가 타락한 상태로 전달될 인간 본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 죄는 인간 번식을 통하여 […] 모든 인류에게 전해질 것이다. […] 원죄는 ‘범한’죄가 아니라 ‘짊어진’죄이며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 (404항) 스스로 저지르지 않은 죄를 갖고 태어난다는 소리도 듣기 거북한데, 성관계와 출산으로 그 죄를 후대에 대물림한다는 가르침에 누가 쉽게 공감을 하겠는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안한 원죄론은 서방교회에서 보편적이고도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원죄란 단어 자체는 사실 성서에 등장하지도 않고, 서방교회와 달리 그리스 교부의 영향 아래서 발전한 동방교회에는 낯선 개념이다. 서방교회 원죄 교리의 기반이 된 성서 구절은 창세기 3장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의 서간, 그중에서도 로마서 5장 12절,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이다. 문제가 된 구절은 그리스어로 쓰여진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ἐφ᾽ ᾧ πάντες ἥμαρτον)”인데,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동방교회의 교부들이 이 구절을 “모든 사람이 아담과 마찬가지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가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다”고 해석했던 반면, 라틴어 번역 성서에 의존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를 지었다(in quo omnes peccaverunt)”로 해석했다. 수사학자로서 비유에 강했던 그는 아담이 하느님의 명을 거역할 때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은 것처럼 제유적인 상상을 펼쳤던 것이다. 오역에 기반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은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숱한 비판을 받아 왔다. 특히 죄의 유전을 성관계와 출산으로 연결한 그의 논리는 인간의 성(sexuality)에 대한 교회의 편협하고 빈약한 이해와 성차별적이고 왜곡된 시각에 그 연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재고되어야 할 여지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가 원죄 교리를 고수하는 까닭은 이 교리가 성서와 교회 전통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일관성을 거스르지 않고, 실수에서 비롯되었지만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관계의 조건과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주목하는 것은 원죄로 귀착한 아담의 죄가 보여주는 죄의 보편성과 죄 속에서 경험하는 인간의 연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죄의 본질을 교만, 즉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주인 행세하고 군림하려는 욕망으로 설명하는데, 현대의 신학자들은 교만이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판단하고 좀 더 다양하고 섬세한 시각으로 죄의 본질을 바라본다. 그중에서도 전통과 현대신학적 비판을 아우르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죄론에 접근하는 미국의 신학자 캐트린 태너(Kathryn Tanner)의 설명에 울림이 있다. 태너는 죄를 “인간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대화하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의도와 희망을 거부하는 인간의 고의적인 실패”라고 설명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본성인 사랑을 지침 없이 내어주며 인간에게 다가오시는데, 인간은 하느님을 닮아 창조된 자신의 본성, 인간됨을 거부하고, 눈을 가리고 부정하며 고립과 불행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의 죄, 한 인간의 잘못된 선택은 자기 자신에게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공동체와 사회를 위협한다. 인간됨을 거부하는 개인의 지극히 사소한 몸짓이 복잡한 사회관계망 속으로 들어올 때 어떤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팬데믹을 끼고 사는 즈음의 사회는 너무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만 몇 사람의 비뚤어진 시각과 선택이 정치적 욕망, 종교적 행위와 결합할 때 어떻게 모든 사람이 짊어져야 할 책임으로 확대되는지, 또 그의 도발을 무시하거나 간과할 때 모두가 어떻게 ‘죄의 값’을 치르게 되는지 말이다. 이 촘촘한 삶의 그물 속에서는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누군가의 죄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 함민복 시인이 말한 것처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 구분하며 살 수 있게” 말로만 죄를 느끼지 말아야 할 일이다. “건성으로 느껴 죄의 날 무뎌질 때 삶은 흔들린다.” (함민복, “죄” 중에서) [2020년 10월 18일 연중 제29주일 ‧ 전교 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가톨릭마산 4-5면, 조민아 마리아 교수(조지타운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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