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칼럼] 하느님 나라와 '공정 사회' 마태오복음 20,1-16의 말씀은 일을 더한 일꾼에게나 덜한 일꾼에게나 똑같은 삯을 나누어 주는 이상한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공정의 관점으로 읽기에는 참으로 껄끄럽고 불편하다. 당시 예수의 말을 듣기 위해 모였던 민중들에게는 더더욱 수긍하기 어려웠을 듯하다. 예수가 살았던 1세기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포도원은 땅을 빼앗기고 노동력을 착취 당하던 히브리 민중들의 피눈물이 서린 장소였다. 총 인구의 5%에 해당하는 부유한 엘리트들은, 다양한 작물을 경작하던 소규모 농장들을 합병하여 거대한 포도원으로 개조한 후, 거기서 수확된 포도주를 로마로 보내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현금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3년이나 지나야 쓸만한 수확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포도 농사의 특성 때문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임금은 체불되기 일쑤였고 늘어가는 빚과 높은 세금은 그들을 헤어나기 힘든 가난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이렇듯 소수 엘리트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민중들의 삶을 수탈하던 대표적인 장소가 포도원이었으니, 예수를 따라다니던 갈릴리 촌사람들은 포도원이란 단어만 들어도 넌더리가 났을 것이다. 예수는 왜 굳이 비유의 배경으로 포도원을 선택했을까?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 고통이 팽배한 냉혹한 현실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현실 속에서 다른 세상을 찾아 나가는 비전이요 길잡이가 된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비유를 곰곰이 짚어 보면 더 당혹스럽다. 우선 이 포도원 주인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사람이다. 이윤을 내기보다는 일감을 창출하는 데 더 관심이 있어 보이는 이 기이한 농장주는, 청지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른 새벽부터 직접 인력시장에 나가 일꾼들을 데려와 일을 시킨다. 아홉 시쯤 다시 장터에 나가니 노동자들이 더 있기에 그들도 데려와 일을 시킨다. 열두 시, 오후 세 시, 그리고 오후 다섯 시에도 나가보니 그때도 일을 찾는 이들이 있어 그들 또한 포도원으로 데려온다. 이윤을 목적으로 한다면 마지막 고용은 손해가 막심할 불필요한 고용이다. 상식적인 고용주라면 인력 시장에서 하루 종일 선택되지 못했던 노동자들을 한식경 일 시키자고 데려오지는 않을 것이다. 경쟁에서 저만치 밀려난 이들에게 과연 일할 ‘능력’이나 있을까. 그러나 이 농장주는 그들이 뒤처진 이유를 묻지 않고 일감을 준다. 일을 마감할 저녁 시간이 되자, 주인은 노동자들에게 하루의 일당을 주는데 모두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을 준다. 그뿐 아니라 가장 늦게 온 자들을 가장 먼저 불러 삯을 지불한다. 이쯤 되면 거의 의도적으로 먼저 온 노동자들의 분노를 유발하려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항의하는 것이 당연하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20,12) 일한 만큼 받는 것이 노동자들의 마땅한 권리인데, 주인의 행동은 공정치 않다. 더구나 줄조차 뒤에 세워 무시하다니, 능력과 효율성에 자존심을 걸어온 자신들의 가치조차 무시 받는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온 일꾼들과 포도원 주인이 생각하는 ‘노동의 정의正義’와 ‘공정’에 대한 관점이 대립하는 것을 본다. 일꾼들은 개인의 능력과 그 능력을 정당하게 사용한데 따른 실적이 임금을 받는 기준, 즉, 사회적 자원을 배분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장한 몸과 숙련된 기술로 새벽부터 시장에 나와 가장 먼저 선택되어 하루의 일을 거뜬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자신들이, 시장에서 도태되어 현장에 늦게 도착해 고작 한식경 일한 자들보다 월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회의 공정과 과정의 공정, 즉 ‘시험과 스펙의 공정’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포도원 주인은, 모든 노동자가 똑같은 조건을 갖고 시장에 나와 경쟁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험을 잘 보고 화려한 스펙을 가질 수 있는 조건과 능력의 차이가 과연 공정한가 의심한다. 그는 여러 차례 직접 인력시장에 나가 경쟁에서 도태된 노동자들을 만난다. 일감을 얻고 싶어도 얻을 수 없는 실업자들의 처지를 알고 있고, 취업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겪는 상실감과 굴욕, 빈곤의 악순환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정의는 ‘시혜적 온정주의’와는 다르다. 그는 스펙이 부족하여 시험에서 떨어진 노동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거저 쥐어 주지 않았다. 적선하는 대신 일할 자리를 만들어 주고, 그들이 할 수 있을 만큼 땀 흘린 대가를 당당하게 받아갈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농장에 실질적으로 돌아올 이윤을 포기함으로써 뒤처진 노동자들이 잃었던 혹은 확보하지 못했던 노동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정의를 시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항의하는 실력자들에게 전혀 미안해하지 않으며 말한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오.”(20,16) 요즘 말로 바꾼다면 어떨까 - 당신이 가진 능력이 오롯이 당신의 것인지 생각해 보시오. 당신처럼 실력과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저이들이 놓인 상이한 처지와 삶의 조건, 저이들이 품고 있는 아직 펼칠 기회조차 없었던 가능성과 잠재력을 생각해 보시오. 그리고 받을 몫을 이미 받았으면서도 동료들이 받아 가는 몫에 불평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시오. 부끄럽지 않소 -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하느님 나라는 이 이상한 주인을 둔 포도원과 같은 나라라고, 예수는 말한다. ‘우수한’ 사람들을 구별하여 혜택과 기회를 몰아 주고, 사회에서 규정한 ‘정상적인’ 신체적 조건과 양질의 교육과 풍족한 환경을 갖지 못해 ‘열등’해진 이들을 무한 경쟁에 빠뜨리는 사회는 하느님 나라와 멀다. 공정 사회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가진 이 무간지옥은, 서로 다른 삶의 조건에 놓여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안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위치를 체념적으로 수용하게 만든다. 시험과 스펙을 앞세운 이러한 공정 사회 담론의 가장 큰 폐해는 선택된 소수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각자도생만이 살길이라 믿으며 서로 적이 되어 밀치고 싸우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정’ 담론에는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끊임없는 성폭력, 20대 청년들의 자살 시도율,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 박탈, 노인 소외, 한부모 가정의 자녀 양육, 성소수자 채용 과정과 직장 내 차별 등, 대다수의 사람들이 적어도 하나씩은 경험하는 노동과 삶의 부당한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예수는 말한다. 이 ‘공정 사회’에서 가장 뒤처진 이가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먼저 될 것이라고. [2021년 8월 29일 연중 제22주일 가톨릭마산 4-5면, 조민아 마리아 교수(조지타운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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