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34. 고해성사 ①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20~1426항)
고해성사의 필요성: 단번에 걷는 아기는 없다 비디오 예술가인 김형규씨가 담배꽁초 20만 개로 실물 크기의 자동차를 만들어 금연 캠페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작업을 한 사람이 30명이었습니다. 담배꽁초 30만 개를 길거리에서 수집하는 데만 2달이 소요되었고, 쓸모 있는 20만 개를 분류하는 것은 2주가 걸렸으며, 2주간의 작업 끝에 거의 3달 만에 작품이 완성되었습니다. 김형규씨는 작업이 끝나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검사 결과 면역체계가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담배를 피운 적도 없는데 그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함께 작업한 30명에게 연락했더니, 모두 자신과 대동소이한 증세를 보였고 어떤 사람은 입원까지 해야 하는 증세를 보였습니다. 30명 중 흡연자가 15명이었는데, 이들도 담배가 얼마나 몸에 해로운지 몸으로 체험하고 모두 금연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 몇 명이 계속 금연에 성공하였을까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한 달도 안 돼서 15명 모두가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된 것입니다.(유튜브 세상을 바꾸는 시간 897회 ‘김형규-스스로와 타협하지 않는 법’ 참조) 죄가 얼마나 안 좋은지 알아서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결심만으로 단번에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만약 결심한 대로 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면 예수님께서 굳이 도와주시러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아기가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걷고 말하고 사리 분별을 할 수 있을까요? 수천 번의 넘어짐 없이 두 발로 걷는 아기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쓰러지고 넘어질 때 부모가 믿어주고 격려해주고 사랑해주어야 아이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하게 되어 결국 해내게 됩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났다고 끝이 아닙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순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교회는 “세례의 은총은 본성의 모든 나약함에서 누구도 해방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아직도 우리를 끊임없이 악으로 이끌어 가는 사욕(邪慾)의 충동과 싸워야 한다”(978)라고 가르칩니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세례를 받은 이들도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는 회개를 위한 싸움”(1426)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물과 성령’(성사)을 통한 새로 태어남의 순서는 “회개, 세례를 통한 새로운 탄생, 성령을 받음, 양식으로 받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1426)입니다. 이렇게 ‘회개–세례–견진–성체’의 4단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자녀로 태어납니다. 여기서 견진의 과정은 마치 아기가 이전 본성과 싸우는 시간과 같은데, 이때 ‘고해성사’가 필요합니다. 고해성사는 아기가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는 과정과 같습니다. 고해성사도 그리스도의 피의 값으로 베풀어지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수없는 고해성사를 통한 주님의 도움으로 조금씩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고해성사는 죄를 인식하기에 “참회의 성사”(1423)로 불립니다. 죄를 이겨야 하는데, 지금 죄에 넘어져 있는 상태를 깨닫지 못한다면 다시 일어서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이 ‘참회’입니다. 특별히 “대죄는 우리에게서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를 박탈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게 합니다.”(1472) 어쩌면 죄에 눌러앉아 고해성사를 보고 새로 시작하지 않는 것만큼 큰 대죄는 없을 것입니다. 또 고해성사는 “고백 성사”로도 불립니다. 모든 죄는 ‘교만’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겸손하게 무릎을 다시꿇고 그리스도께 자기 죄를 고백하는 예절이 행해져야 합니다. 하느님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이미 알고 계시지만, 교만에 대해 속죄하는 행위로 먼저 겸손하게 자기 죄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피의 공로로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용서의 성사”라고도 불립니다. 고해성사는 죄 때문에 단절된 하느님과의 친교가 새롭게 시작되므로 “화해 성사”(1424)라고도 불립니다. 새롭게 하느님 자녀로 살기 시작한다는 의미로 교부들은 고해성사를 “수고스러운 세례”(980)로 불렀습니다. 아기가 부모처럼 되기 위해 넘어지고 일어섬을 멈추지 않듯, 고해성사도 세례의 믿음이 자신 안에 머무름을 보여주는 가장 중대한 표징입니다. [가톨릭신문, 2021년 9월 5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