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137. 복음과 사회교리 - 복음의 권고 ‘축복이 되어 주고, 축복을 나누고’(「간추린 사회교리」 517항)
삼위일체 사랑, 인간의 관계성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근거 거인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나밖에 몰랐었구나. 이제야 왜 이곳에만 봄이 오지 않았는지 알겠군. 저 가엾은 꼬마를 나무 위에 올려 주어야지. 그리고 저 담은 다 부숴 버릴 테야. 이제부터 내 정원은 언제까지나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게 할 테다.”(오스카 와일드 「저만 알던 거인」 중) 우리 마음의 봄은 언제 오는가?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동화 작품 「저만 알던 거인」에서 욕심 많은 거인이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거인은 넓은 집과 정원을 가졌는데 욕심 때문에 ‘함부로 들어오면 고발하겠음’이라는 팻말을 써 붙이고 그곳에서 혼자만 삽니다. 재밌는 것은 예쁜 꽃과 나무, 새들이 그 팻말을 보고 모두 도망갔고 오직 눈과 서리, 북녘 바람만 썰렁하고 황량한 정원을 좋아했기에 그곳에는 한동안 봄도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요한 건 온 세상이 봄이었음에도 거인의 집만 여전히 겨울이었다는 겁니다. 이와 유사한 여러 소설이나 동화에서 욕심은 고립시키고 단절시키는 트리거(Trigger, 기폭제)로 묘사됩니다. 욕심 많은 이에겐 친구가 없고, 그는 항상 재물이 쌓여 있지만 어둡기 짝이 없는 대저택에서 혼자 지내며, 급기야는 외로움 속에서 고통을 받기 일쑤입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스크루지, 동생을 핍박하던 놀부, 혹부리 영감 등이 욕심이 불러오는 재앙을 그려냅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함께 사는 삶, 욕심이 아닌 나눔을 통해 행복과 기쁨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깊은 교훈을 줍니다. 왜 사랑하며 살아야 할까? 우리 신앙의 핵심이자 복음의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이야기하면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태 22,34-40 참조) 우리는 상처받고 실망하기 두려워 ‘왜 사랑해야 할까’라고 되묻지만,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이웃을 통해 사랑과 도움을 받고, 기쁨을 얻습니다. 저출산과 고령화를 겪는 일본은 2035년에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1인 가구가 될 거라 전망합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도 1인 가구가 급증했고, 전통적 가정 형태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촉발한 경제위기와 빈익빈 부익부로 인해 ‘비자발적 1인 가구’의 증가도 부추겨지고 있다는 진단도 있지만 1인 가구의 증가 원인은 가장 먼저 삶의 만족과 보람을 찾는 방식이 변화됐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사회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과 권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자칫 이것이 내 욕심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형태가 되지는 않는 것인지, 그래서 이웃을 배제하고 서로를 소외시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자유와 권리는 높은 울타리나 장벽이 되기보다 아픔과 어려움에도 사랑할 자유, 내 권리만큼 이웃의 권리도 존중하는 성숙함 속에서 무르익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축복이 되어 주는 존재 가톨릭 사회교리 역시 인간을 관계성 안에서 바라봅니다. 삼위일체가 서로 일치하시는 가운데 온전히 사랑하시며 내어주시는 신비이듯, 인간도 서로 사랑하면서 일치하고 연대하며 진리와 사랑으로 나아갑니다.(「간추린 사회교리」 34항) 동시에 자유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깊게도 해주나(34항), 사랑과 결합하여 삶의 진정한 성취를 이룬다고 강조합니다.(36항)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생명입니다. 사는 기쁨이란 나누고 함께하고, 누군가에게 도움과 힘이 돼 주고 내가 그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욕심은 소외와 고립, 단절을 초래합니다. 그것은 생명이 아닌 화석 같은 죽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된 생명은 재물과 세상에 자유로우며 하느님과 이웃을 온전한 동료이자 친구로 여기는 친교와 우정에서 비롯되며 우리를 행복과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생명으로 초대하는 하느님의 편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시며, 인간 완성과 세계 개혁의 근본 법칙은 사랑의 새 계명이라고 가르치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이들에게 사랑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보편 형제애를 이룩하려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신다. 이 법칙이 인간관계를 움직이는 모든 힘의 궁극적인 잣대와 규범이 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바로 하느님의 신비, 곧 삼위일체의 사랑이야말로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 인간의 지상 활동이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되는 근거이다.”(「간추린 사회교리」 54항) [가톨릭신문, 2021년 10월 3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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