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신부의 사회교리 해설] “성숙한 정치적 풍토 마련을 위하여” 안젤라 : 단장님, 얼마 전 저희 시어머니와 언쟁을 벌였어요. 글쎄, 정치라면 신물이 난다고 하시면서 TV를 치우시는 거예요. 진정하시라고 해도 말도 안 들으시고 저한테까지 역정을 내시는 거예요. 근데 너무 막무가내시니 어쩌겠어요? 그런데 저도 정치를 보면 간혹 실망과 피로를 느낄 때가 많아요. 마리아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알아보기 – 피곤한 정치? 하지만 필요한 정치! 그런 분들 계실 겁니다. 정치 상황을 보면 실망과 피로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요. 그래서 정치도, 정치인도, 정치판도 보기 싫다고 말입니다. 저마다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고 그런 개인과 정당들이 공존하며 협력하려다 보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정치판이죠. 정치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기술이라고 낙관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정치는 거짓말에 불과하고 심지어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며 혹평하기도 합니다. TV나 신문을 보면 정쟁과 비방, 비난을 위한 흠집 내기가 가득합니다. 밤낮으로 정치인들을 위해 기도함에도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끊이지 않는 부정과 비리는 분명 실망스럽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사회를 위한 필연적 기능이고, 그것을 외면한 대가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심화하기 – 그걸 왜 그렇게 해! “저 사람들 왜 저러지?”, “저걸 왜 저렇게 해?”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적 상황에 대해 이런 비판을 할 수 있지요. 사회 현안은 갈등이나 논란이 발생하기 일쑤입니다. 이해관계가 걸릴 뿐 아니라 목적이나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욕심이나 무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 가치와 철학에 대한 상이한 안목이 작용합니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거나, 인권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는 사람과 가톨릭신자의 정치적 안목은 분명 같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가톨릭 신앙공동체가 추구하는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과 ‘공동선’ 그리고 ‘윤리성’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392항) 요컨대 문명화된 모든 공동체는 통치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권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이를 위임받은 위정자는 대리자이자 봉사자이며 그렇기에 생명과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함이 가톨릭교회가 제시하는 정치관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393항) 가톨릭신자라면 “그걸 왜 그렇게 해!”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봐야 합니다. 1. 통치 권위가 불가피하나 그 권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393항) 2. 인간을 정치 공동체의 토대와 목적으로 여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근본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함으로써 인간 존엄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뜻이다.(388항) 3. 권위는 도덕 질서에 따라야 하고 그 첫째 원리는 바로 하느님이시다.(396항) 4. 인간 공동체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를 철저하게 존중하시는 하느님의 통치 방식을 본받아야 한다. 그들은 하느님 섭리의 봉사자로서 행동해야 한다.(383항) 5. 정치 공동체는 진리와 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에 이끌려 공동선 달성을 위하여 확고히 협력하도록 요청받는 구성원 각자의 온전한 성장을 이루기 위하여 존재한다.(384항) 사회교리의 가르침 – 사회교리에 대한 이해와 함께 성숙한 자세도 필요 이 밖에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재화의 나눔과 선용, 생태환경과 동식물에 대한 존중, 특히 경제 환경에서 물신주의와 다르지 않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풍조에 대한 반성도 포함돼야 합니다. 재론하지만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 문제는 복잡하고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최선이 아닌 차선이 필요할 수도 있고 올바른 식별과 인간에 대한 따스한 마음, 서로를 배려하는 예의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여전히 우리의 정치풍토는 갈등과 공격, 맹목적 진영논리가 주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대화마저 거부하고 반지성주의와 배타주의, 혐오도 만연합니다. 이는 분명 옳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에 큰 문제가 되는 가짜뉴스, 막말 등은 성숙한 정치풍토 마련을 저해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책임도 있습니다. 레지오의 가르침 – 올바른 관계를 위한 밀알처럼 올해는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선조들을 기억하며 우리 신앙도 쇄신되도록 노력해야겠지요. 그러나 그 노력은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되길 바라는 지향도 포함돼야 합니다. 우리 선조들께서도 당시의 반상제도, 노예제도, 온갖 억압과 부조리함에 맞서 모든 이가 구원을 받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이바지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이야기처럼 반목과 대립, 갈등과 분열은 개인과 사회를 위협합니다. 레지오 교본에서 제12장 외적 목표를 보면 “모든 이를 하나로 만드는 일”을 언급합니다. 레지오 단원은 응당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추구하고 투신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의 결실인 사회적 가치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즉 레지오 단원들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고 또한 사회를 갈라놓는 어려움을 치유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이를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적대자를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으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이웃과 형제를 보듬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내세워야 할 목표는 사람들 사이에 공동체 관계를 맺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392항>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0월호, 이주형 세례자 요한 신부(서울대교구 성서 못자리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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