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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138: 고해성사 5(1461~1466항)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12 조회수1,056 추천수0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38. 고해성사 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1~1466항)


고해 사제의 모델은 탕자를 기다리다 맞아들이는 아버지

 

 

가끔 신자들이 고해성사 보다가 사제에게 상처를 받아 성당에 아예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제도 인간이기에 실수합니다. 고해를 듣다 보면 화도 납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정의가 아닌 자비를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돌아오는 탕자를 맞아들이는 아버지가 화를 내는 모습을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고해성사가 오히려 신자들을 주님 앞에 돌아오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면에서 사제는 조금 더 자비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일만 탈렌트 탕감받은 당사자가 사제 자신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제는 죄인에 대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표지이며 도구입니다.”(1465)

 

자기 죄를 “고의로 숨기는 사람들”은 “환자가 부끄러워서 자신의 상처를 의사에게 감추는 것”(1456)과 같습니다. 만약 의사가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면 환자도 부끄러운 상처를 어렵지 않게 보여줄 것입니다. 사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착한 목자, 상처를 싸매 주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탕자를 기다리다 맞아들이는 아버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고 자비로운 판결을 내리는 의로운 재판관의 직무”(1465)를 수행합니다.

 

사제가 자비로워지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한 젊은 신부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큰 회개를 합니까? 이런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내가 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나를 통해서 하신 것이며 나는 그저 ‘도구’였을 뿐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영혼들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왜 다른 신부들은 신부님이 고해성사 중에 하시는 기적을 행할 수 없는 걸까요? 그들도 하느님 은총의 도구인데요. 그들도 영혼들에 좋은 일을 하려고 매우 열심히 기도하는데요.”

 

비안네 신부는 망설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룩한 친구이며 스승인 밸리 신부가 자신에게 종종 말하던 것을 그 젊은 신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죄인들의 변화는 기도로 시작하여 참회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죄인이 사제이든 친구이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군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물론이요, 단식하고 잠을 포기하고라도 힘든 고행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또 자신의 양 떼들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고통을 겪지 않는 목자는 완전히 실패할 위험 속에 있는 것입니다.”(출처, 수원교구 주보 2009년 12월 6일자 ‘죄인들의 변화는….’)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비안네 성인의 정신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은 그저 ‘도구’일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무엇을 흘려보내는지를 알기 위해 ‘고행’을 하는 것입니다.

 

“고해 사제는 하느님의 용서를 마음대로 다루는 주인이 아니라 종입니다.”(1466)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만의 고유 권한입니다. 이 권한을 “당신 사도들에게”(1461) 맡기신 것이고 “사제들은 교회법을 통해서 주교나 교황에게 위임을 받아 고해성사의 직무를 수행”(1462)하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사제가 심판의 주체가 아닌 용서의 ‘도구’라는 처지를 이해하고 나에게 주어진 용서의 가치가 얼마나 큰 하느님의 고통인지 인지한다면, 그 죄 사함이 흘러가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장애가 되는 일은 할 수 없게 됩니다.

 

또 사제는 그리스도의 피, 곧 자비를 흘려보내 죄를 씻어주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면 나의 완고함 때문에 그 은총이 흘러가지 않는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한없이 자비로워집니다. 형이 동생인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껴보았다면 동생에 대해 그리 무자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동생의 용서받음은 아버지 고통이 비로소 기쁨으로 열매 맺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고해 사제에게서 항상 탕자를 기다리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가톨릭신문, 2021년 10월 10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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