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40. 고해성사 ⑦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8~1470항)
고해성사는 관계회복의 열쇠 고해성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효과는 무엇일까요? ‘관계회복’입니다. 교리서는 고해성사의 효과가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1468), 그리고 자연과 이웃을 포함한 “교회와 화해”(1469)로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하면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이웃, 자연과의 친교와 일치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죄가 관계를 단절시키는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 안에 ‘양심’이 있어서입니다. 게다가 원죄까지 입고 태어납니다. 모든 인간은 죄책감의 노예란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양심의 가책’을 안고 삽니다. 이 양심의 가책이 일으키는 것이 관계의 분열입니다. 우리에겐 양심의 가책을 인정하지 않든가, 아니면 양심의 가책을 해결하든가, 두 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우선 양심의 가책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도 모르게 ‘자기합리화’의 길로 빠집니다. 대표적인 자기합리화가 ‘하느님과 이웃을 심판하는 일’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책감을 느껴 두렁이를 입었지만 충분하지 않자 죄의 탓을 타인에게 돌리려 했던 행위와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점점 타인을 심판하면 이웃과 단절되고 급기야 타인의 아픔을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소시오패스’가 됩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유다 지도자들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영화 ‘양철북’(1979)의 주인공 오스카는 어른들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일부러 성장하기를 거부합니다. 어른들의 잘못을 볼 때마다 ‘양철북’을 두드립니다. 그의 눈에는 모든 어른이 부조리하고 부도덕합니다. 그는 점점 더 강력하게 어른들을 비판하고 그렇게 자신 안에서 울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무시합니다. 그 결과는 자신이 비판하는 히틀러와 같은 소시오패스가 되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스카처럼 비판의 양철북을 두드리며 소시오패스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를 자기 탓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엔 그 죄의 무게에 짓눌려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선택하는 것이 자살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리옷 유다가 그런 경우입니다. 죄를 뉘우쳐서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죄책감을 자기 스스로 짊어지려 했던 어리석음의 결과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클랜’(2015)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에 부역한 푸치오가 부자들을 납치해 일말의 양심도 없이 돈을 갈취했던 사건을 담았습니다. 아들 알렉스는 아버지가 친구를 납치하는 범죄에 작은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돈을 받고는 친구를 살해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일에서 손을 떼려 합니다. 동생은 아버지를 떠나 도망칩니다. 하지만 알렉스는 아버지를 떠날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다 결국 경찰에 잡히고 맙니다. 알렉스와 아버지는 종신형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다 가정을 위해 했다고 줄기차게 자기합리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합리화를 하지 못한 알렉스는 어떻게 했을까요? 법정으로 가다가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시도를 했지만, 매번 실패합니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법학 학위를 받아 2008년 출소하여 변호사 일을 합니다. 소시오패스가 변호사가 된 것입니다. 양심이 없다고 아무리 주장하려 해도 그 결과는 소시오패스가 되거나 자살하게 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양심’은 올바른 길을 가도록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알람과 같습니다. 운전하다 차선을 변경할 때 ‘깜빡이’를 넣는 것은 알람을 울리는 기능과 같습니다. 만약 ‘깜빡이’를 무시하고 사고가 났다면 스스로 차를 고쳐야 할까요?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만 고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의 문제는 하느님과 해결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잘못했으면 부모에게 용서받으면 그만입니다. 스스로 감추고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부모의 자비를 무시하는 더 큰 죄가 됩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 단절로 나아가겠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이 고해성사로 양심의 가책을 없앰으로써 자기를 합리화할 필요가 없어지게 하지 않으면 인간관계의 단절은 자연적인 절차입니다. [가톨릭신문, 2021년 10월 24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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