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42. 고해성사 ⑨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80~1498항)
고해성사는 ‘공동 고백’보다 ‘개별 고백’을 지향한다 고해성사의 형식은 크게 ‘개별 고백’과 ‘공동 고백’이 있습니다. 공동 고백은 “중대한 필요가 있을 때 일괄적으로 고백하고 일괄적으로 죄를 용서해 주는”(1483) 형식입니다. ‘중대한 필요’란 곧 전투에 나가야 하는 군인들, 바이러스 범유행처럼 대면 고해가 어려운 상황, 고백자의 수보다 사제의 수가 턱없이 부족할 경우 등입니다. 하지만 공동 고해가 일반화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공동 고해를 할 때도 “사죄가 유효하려면 신자들이 적절한 때에 자신들의 대죄를 고백하겠다는 의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1483) 물론, 공동 고해는 교회의 공적 전례 행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고해성사 형식은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는 유일한 일반적 방식”(1484)인 ‘개별 고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1484) 곧, 용서의 대상은 “너희”가 아니라 개별적인 “너”입니다. 하와가 죄를 짓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죄책감을 분산시킬 대상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그 벌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아담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공범을 만들면 죄의 무게가 경감될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개별적으로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자녀들이 죄를 지었을 때 한꺼번에 와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것보다는 개별적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더 기쁘지 않겠습니까? 또 그런 개별적인 고백이 본인을 위해서도 더 낫지 않겠습니까? 성체도 한꺼번에 여러 명에게 분배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분배하는 것처럼 궁극적인 관계의 기본은 1:1입니다. ‘임종몽’이란 것이 있다고 합니다. 내과 전문의 크리스토퍼 커는 1400명이 넘는 환자와 10년 동안의 인터뷰를 정리해 「누구나 죽기 전에 꿈을 꾼다」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크리스토퍼 커는 호스피스 병동 전문의를 하며 임종 직전의 환자 대부분이 꿈이나 환시를 체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마지막 꿈으로 개별적인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대부분 꿈은 그 사람이 알았던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런 꿈은 일정한 패턴이 있는데 보통은 처음에 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죽은 이들이 나타납니다. 이는 마치 “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했느냐? 그리고 내세에서 만날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69세의 전직 경찰관 에디도 임종몽을 꾸었습니다. 처음엔 에디에게 먼저 죽은 아내가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얼굴로 앉아있기만 했습니다. 에디는 자신이 아내를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아내도 자신을 만나기 원치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에디는 사실 생전의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했었습니다. 그 다음은 경찰직을 수행할 때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의 기억들이 나타났습니다. 때리고 고문하고 부정한 돈을 받아가며 방탕하게 살았던 잊고 싶은 기억들이 잔인하게 꿈으로 나타났습니다. 에디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에디는 사제를 불러 고해성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어차피 혼자 가야 하는 길입니다. 사실 에디가 그런 삶을 살게 된 이유는 어렸을 때 삼촌에게 성추행을 당한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몇 번 자살 시도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주님은 변화될 기회를 주십니다. 에디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에디가 모든 부끄러운 죄를 다 고해한 뒤, 딸에게 “그래, 이제 마음이 편안하다. 아빠가 천국에 바로 갈 수는 없을지라도 연옥에는 갈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아빠를 기다리고 있대”라며 새로운 꿈을 꾸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개별 고백은 하느님에 대한 화해와 교회에 대한 화해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형식”(1484)입니다. 형제가 밥을 먹는다고 내 배가 부르지 않고, 아들이 포도를 먹었다고 아버지의 입에서 신맛이 나지 않습니다. 결국, 죄에 대한 책임은 개인의 몫이고 개인의 책임입니다. 물론 개별 고해는 공동 고해보다 부담스럽고 힘들지만, 분명 죄에 대한 온전한 책임을 지려 하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더 큰 은총을 보장합니다. [가톨릭신문, 2021년 11월 7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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