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볼까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 - 친교, 참여, 사명
시노드는 왜 할까요? 2021년 10월17일,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일제히 개막미사를 거행하면서 제16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이하 시노드)가 3년간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예년과 달리, 이번 시노드는 주교님들만의 회의가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앙인들이 참여하는 여정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이 시노드를 왜 열게 되었는지, 이번 시노드가 왜 특별하며 어떤 시간이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세 달에 걸쳐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시노드는 왜 하는 것일까요? 모든 위기는 기회인 법입니다. 평소 건강에 대해서 별 생각 없이 지내다가 건강검진에서 혈압이나 혈당수치가 갑자기 치솟으면 그제야 식생활에 신경 쓰고 운동도 하게 되지요. 코로나 사태라는 위기도 일종의 기회입니다. 우리에게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식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기회 말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이 갖가지 불평등과 불의, 갈등으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알면서도 그런 문제가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 여겼습니다. 민족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같은 문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요. 기후 변화를 걱정하고 개탄하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그 우려를 실천으로 옮기는 데는 더뎌서 우리가 함께 사는 ‘공동의 집’인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내 성공을 위해서 경쟁자 이웃의 실패를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주의적 태도가 널리 퍼졌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세계인 모두가 더 이상 방관자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홀로 아무리 건강하게 살려고 해도, 누군가 감염되고 나면 방역의 벽은 무너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런 깨달음을 “한 사람의 불행은 모든 사람에게 해가 된다”(회칙 ‘모든 형제들’ 32항)는 말로 축약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타인과 세계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운동”(렛 어스 드림, 29쪽)이 필요하다고 보셨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시노드는 우리 가톨릭 신앙인들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방향을 향해 마음과 뜻을 모으는 기회라 하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다니 뜻깊은 일이긴 한데, 그걸 왜 우리가 하나요? 교회가 위기 속에서 세상의 빛이 되었던 경험들은 역사 속에 무수히 많습니다만, 한 예를 들자면 서기 250년에 로마제국을 강타했던 역병(Plague of St. Cyprian)이 있습니다. 이 역병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무렵, 로마에서만 하루에 5천명이 목숨을 잃는 아수라장이 펼쳐집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역병의) 기습으로 자기 집에 갇혔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군중들의 집이 하나하나 침범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몸서리를 치며 감염을 피해 피난을 가면서 사악하게도 자신이 소중하게 아끼던 사람들도 팽개쳤습니다.”(치프리아누스, Vita 9) 로마제국의 공권력은 역병 속에서 상황을 완화시킬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약자를 돌보는 일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반면, 가톨릭교회는 주교들의 지도하에 체계적인 병자 구호활동을 벌이고 환자들과 고통 받는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교회의 활약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목숨을 내던진 자’(파라볼라니)라고 부르며 감탄할 정도였지요. 3세기의 모진 박해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신앙이 오히려 더 확산된 데에는, 이런 공동의 헌신과 보살핌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가 이렇듯 갈라진 세상에 더불어 사는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시고 우리 모두는 그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각각 구별되면서도 한 분이시라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느님을 닮아 창조된 우리 인간도 각각 구별되는 고유한 가치를 간직한 채 일치를 이루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어느 한 사람, 한 생명도 팽개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함께 나아가는 여정, 이것이 신앙의 길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일찍부터 함께 하는 여정을 교회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하려고 애썼습니다. ‘시노드’라는 말도 ‘함께 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신앙과 교회의 이상이 역사 속에 항상 실현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가르치는 교회’와 ‘듣는 교회’가 나뉘어져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저 하라는 대로 따르는 것이 신앙의 길인 양 여기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이번 시노드를 통해서 모든 신앙인들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서로 대화하고 경청하자고 말씀하십니다. 회의 한 번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시노드라는 이름으로 회의를 한다고 해서 교회와 세상이 단번에 달라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회의를 통해서 아무리 좋은 제도나 규정을 도입한들, 사람들의 됨됨이가 달라지지 않으면 쇄신이 이루어질 수 없겠지요. 이번 시노드는 회의를 통해서 세상을 구할 묘안을 짜내라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시노드는 함께 하는 정신을 배우고 터득하는 기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여정에 관하여 함께 성찰함으로써 교회의 다양한 지체들이 성령께서 이끌어주신 서로의 체험과 관점을 나누고 경청하는 가운데 앞으로 나아가야 할 쇄신의 길을 배우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빛으로 기도 안에 하나 되어, 더욱 깊은 친교, 더욱 온전한 참여, 세상 안에서의 사명 수행을 위해서 함께 가는 여정을 직접 체험하고 배워보자는 뜻입니다. 시노드를 형상화하는 그림만 봐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이란 남녀노소, 신분과 처지를 가리지 않고 성령의 인도 아래 함께 가는 길을 뜻한다는 점을 시노드 문장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노드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왜 이번 시노드가 다른 시노드보다 특별한지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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