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볼까요] 시노드 모임을 위한 유혹 피하기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이사 1,18~20)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시노드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용하신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한 언론인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당신 생각을 밝힌 책, ‘렛 어스 드림’(21세기북스, 2020)에서는 이 구절을 “오너라, 이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대담하게 꿈을 꾸어 보자!”로 바꾸어 표현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신앙의 대화를 통해서 코비드-19 사태로 드러난 세계적 위기 상황을 함께 극복하고, 교회를 쇄신하는 과정을 이어가길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허심탄회하게 대화하자고 해도, 실제로 ‘좋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우리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해!”라며 시작한 대화가 오히려 불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껏 속내를 이야기했다가 씁쓸한 침묵으로 끝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시노드 사무국에서는 시노드 예비문서를 전 세계 교회로 보내면서 ‘유혹 피하기’라는 내용을 함께 넣었습니다. 다음 호에서 그 유혹의 내용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대체로 요약하면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라는 권고입니다. 그리고 신앙 감각이라는 개념이 그런 권고를 가능하게 하는 신학적 기반으로 제시됩니다. (1) 무엇을 말할까 생각하기 전에 무엇을 들어야 할까를 생각하는 모임 어떤 모임이든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지’하는 마음으로 모이면 경청도 대화도 친교도 이뤄지기 힘듭니다. 마음가짐이 내 말의 정당성과 영향력을 높이는데 기울어져서 타인의 말을 건성으로 듣거나, 내 주장과 부딪히는 다른 주장들을 반박할 방법을 먼저 찾게 됩니다. 교회가 칼날 같은 논리와 다듬어진 언변이 필요해서 시노드를 연다면, 굳이 이번 같은 시노드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정예 신학자들과 소수의 교회 권위자들만으로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시노드 정신(시노달리타스)이 말하는 것은 그런 말잔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노달리타스 개념은 경청의 자세를 촉구합니다. 하느님 백성에게 물어보는 교회는 결코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반대로 본당 사제가 신자들에게 묻지 않고, 정부 관리가 주민들에게 묻지 않고, 주교가 신자들에게 묻지 않을 때 교회는 오류의 위험을 안게 됩니다. ‘무엇을 말할까’ 이전에 ‘무엇을 들을까’가 먼저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물어보고 경청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교회 안에서 들어야 했지만 듣지 못했던 목소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왜 우리 교회 안에서 실패와 좌절 속에 낙담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게 되었을까요? 현대 사회의 경쟁 속에 뒤처진 이들의 목소리는 왜 듣기 힘들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첨단 문명의 이기들이 주는 편리함을 누리는 사이에 누군가는 무너진 생태 정의 때문에 고향을 잃거나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리는 편안한 일상이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으로 해서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희생을 강요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왜 듣지 못하고 있을까요? 제한된 사회의 자원들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데 비해서, 다수의 사람들은 발전의 혜택은커녕 말 없는 낙오자가 되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번 시노드에서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의견을 나누며 서로 경청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2) 궁극적으로 들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난 두 해가량 코비드-19 사태를 거치면서, 경청하고 대화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잃어버린 분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듯 “우리는 가상현실의 죄수가 되어 현실의 맛과 풍미를 잃었고(모든 형제들, 33항)”, “디지털 매체는 진정한 대인 관계의 발전을 차단하면서 사람들을 중독과 고립의 위험, 그리고 구체적 현실과의 접촉을 점차 잃을 위험에 노출”(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88항)시켰습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사람이 몇 명 모이든 간에 서로 대화하지 않고 각자 손에 쥔 전화기만 응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예전에는 대놓고 말할 수 없었던 조롱과 비아냥, 독설 같은 것이 얼마나 많아졌습니까? 그런 가운데 시노드 모임이라는 대화의 기회가 생겨도 각자 자기 주장만 뱉어내고 말거나, 반대로 아무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나 높겠습니까. 그래서 시노드 모임에서 끊임없이 서로 상기시켜야 하는 것은, 우리가 듣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소리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이번 시노드 모임을 가급적 전례적 분위기에서 가지라는 시노드 사무국의 권고도 그런 맥락에 있습니다. 토론회나 회의, 논쟁의 장소가 아니라 함께 기도하고 성령께 의지하면서 이웃들을 통해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자는 것입니다. 교회 내 여러 모임에 참석해 보면, 그저 형식적으로 시작기도를 바친 후에 막상 토의 중에는 할 말, 안 할 말 마음껏 쏟아내다가 마지막에 영광송으로 마침기도를 드리고 마무리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번 시노드부터는 중요한 일일수록 먼저 기도하고, 하느님 말씀을 함께 듣고 기도 안에 마음과 뜻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이번 시노드에 앞서 시노드의 신학적 배경을 설명하는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라는 제목의 문서가 발표된 바 있습니다. 이 문서를 작성한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시노달리타스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신앙 감각’을 특히 강조합니다. 신앙 감각이란 복음의 진리와 관련해서 모든 신자들이 본능처럼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데, 달리 말하면 신자들의 지식이나 교육 정도,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관계없이 성령의 인도와 보호하심에 힘입어 하느님의 목소리를 전하는 직분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모임에서는 많이 배우신 분, 많이 가지신 분이 대화를 주도하거나 발언을 독점하는 모습을 봅니다. 시노드는 그런 모습과 달라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누구도 소외됨 없이 신앙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그런 이야기 가운데 서로의 신앙 감각을 통해서 이해의 폭을 넓히며, 그 결과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뜻하시는 바를 알아듣고 실천하는 자리가 시노드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3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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