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볼까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 - 친교, 참여, 사명
'말하기와 유혹' 연중 8주일에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들은 대화와 말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옹기장이의 그릇이 불가마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대화에서 수련된다.”(첫째 독서: 집회 27,6)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복음: 루카 6,45) 시노드를 통해서 대화에 초대된 신앙인들은 말을 통해서 마음과 지혜를 모으고자 합니다. 이전에는 교회 안에서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었다면, 이번 시노드에서는 누구나 말을 하고 그 말을 경청함으로써 공동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자는 것이지요. 물론 활발한 토론과 대화는 공동체의 원활한 의사소통 과정 중의 하나면서 공동체의 쇄신을 돕는 좋은 수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서 마음을 모을 수 있다거나, 토론만 하면 새롭고 창조적인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현실에서 순진한 이상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토론이 공동체에 분열을 가져오거나, 공동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던 사람들에게 일종의 알리바이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이러니 내가 이러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말이지요. 토론과 대화에서 넘어야 할 장애물들을 사회과학과 심리학에서는 ‘편향(Bias)’이라고 일컫습니다. 우리는 인지와 토론과정에서 다양한 편향을 경험합니다. 토론과 대화에서 넘어야 할 장애물들 ‘편향’ 첫째로,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편향은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입니다. 토론을 통해서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상대방의 논지를 부정하거나 거부하기 힘들 때, 머리로는 수긍하더라도 마음으로는 앙심을 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상처 입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신앙공동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상처받는 사람이 나오고 서로 복수심을 드러내는 모습이 드물지 않습니다. 둘째, 가용성 편향(Availability heuristic)도 인지 과정을 왜곡시켜서 건강한 대화를 어렵게 만드는 한 요소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손에 가까이 잡히는 것이 세계의 전부인 양 판단하고 결정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처럼 급격한 변화를 거친 사회에서 이 가용성 편향은 각자 자기가 경험한 시대와 공간에 갇히는 세대 단절의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냐’고 상대를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낙인찍기 전에, 우리가 매일 읽는 복음은 2천 년 전에 쓰였다는 점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내가 옛날에 다 해봤는데, 해도 안 돼!”라고 단언하기 전에 현재의 달라진 상황을 고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생존자 편향(survivorship Bias)도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어느 공동체나 집단이든 거기에는 성공적으로 공동체 내에 입지를 마련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거나 떨어져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말 없는 실패자나 낙오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오직 성공적으로 안착한 사람들만 공동체 구성원으로 고려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패자나 낙오자의 숫자가 상당하거나 생존자 숫자보다 많을 경우에 그 생존자에 비추어 공동체의 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처럼 생존자보다 낙오자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냉담자 숫자가 수계 신자의 숫자를 넘어선지 오래지요) 더 그렇습니다. 넷째, 집단극화 이론(Group ploarization)에 따르면, 집단이 하나의 이슈에 집중할 때 의견이 대립하는 경향을 띠다가 결국 극단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모 아니면 도’라는 태도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는 사람들끼리 품위를 지켜서 대화하자는 상식적인 부탁도 소용없습니다. 더욱이 아무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경우라도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문제가 있는 법인데, 언제부턴가 선을 넘어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해놓고 그것을 ‘사이다 발언’ 이라 여기는 이들을 종종 봅니다. 다섯째, 정보의 비대칭성도 건강한 대화의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신학적 토론이든, 교회 운영의 문제이든 간에 대화와 토론에 참여하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양에 큰 편차가 있습니다.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이들과 주님의 기도도 외기 어려워하는 이들이 같은 주제를 두고 대화하고, 종교만의 독특한 어휘와 문법 구조에 익숙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입니다. 이럴 경우 대화는 대단히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거나, 아니면 정보를 가진 이들의 독점적인 발표 자리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이 현상이 ‘권위주의’와 결합하게 되면, 대화는 일방적으로 말하는 화자와 듣기만 하는 청자로 양분되는 소통 불가의 상태에 빠질 뿐입니다. 피해야 할 아홉 가지 유혹 경계해야 이런 어려움 때문에 시노드 사무국은 모임에서 우리가 피해야 할 아홉 가지 유혹을 경계하라고 알려줍니다. 첫째, 하느님의 이끄심을 따르는 대신 우리 스스로 이끌고자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시노드는 궁극적으로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이고, 이 자리를 이끄셔서 결실을 맺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시노드 모임의 주인공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둘째, 우리 자신과 눈앞의 관심사에만 집중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는 것이라 해서 그것이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조선시대 예송 논쟁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지만 오늘 우리에게 아무 쓸모없듯이, 지금 우리가 뜨겁게 다루는 주제가 다른 이들에게는 별 관심 없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우리 시야를 보다 멀리, 그리고 넓게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셋째, 오직 ‘문제’만을 보려는 유혹입니다. 사람은 잘못을 저질러도, 하느님은 그 잘못조차 구원을 위해 이용하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 잘잘못만 따지지 말고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할 것인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넷째, 오직 구조에만 집중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그 시스템과 제도를 이용하고 운영하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우리 자신의 회개와 쇄신, 나부터 바꾸려는 노력이 없으면 어떤 제도 개선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다섯째, 교회의 가시적 한계 너머를 보지 않으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시노드는 우리 교회만 융성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과 더불어 일치하려는 노력입니다. 여섯째, 시노드 과정의 목표들에 대한 집중을 흐리게 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너무 많은 이야기를 벌려 놓을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함께 가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곱째와 여덟째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 그리고 시노드를 의회의 일종으로 치부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시노드는 편을 갈라서 어느 쪽이 이길지 결정하는 논쟁의 장소가 아니어야 합니다. 끝으로, 이미 교회 활동에 속한 이들에게만 경청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세례받는 이들은 모두가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여러 가지 여건의 제약 때문에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까지도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체험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시노드 대화 모임 중에 우리가 조심해야 할 유혹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시노드에서 다룰 주제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4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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