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살기 이미지는 남고 메시지는 사라지다 부부가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 아끼지 않습니다. 생일과 결혼기념일 같은 날들을 꼬박꼬박 챙기고, 지갑과 휴대전화에는 배우자 사진이 항상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함께 살 집을 구하거나 목돈이 들어가는 자동차 구입 같은 일은 서로 상의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도 각자 생각대로 하자고 합니다. 달콤한 연애 감정은 나눌 수 있지만 함께 의논하고 책임을 지는 일은 피합니다. 이 부부는 정말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걸까요? 전국 어느 성당에 가도 교황님의 사진이나 그림을 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가톨릭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호감을 얻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사람 좋은 함박웃음과 소탈한 이미지로 널리 얼굴을 알리셨습니다. 하지만 교황님께서 어떤 메시지를 주셨는지 아는 분들, 그 권고를 실천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되는지 의문입니다. 예컨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2천년 대희년을 선포하시면서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전 세계적인 부채 탕감 운동을 촉구하셨지만(교서 「제3천년기」, 1994) 이 호소에 담긴 정신을 존중하며 실제로 부채를 탕감하고 가난한 국가와 그 국민들을 위해서 선행을 베푼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설명하고 신자들에게 판단과 실천의 기준을 제시하는 회칙들을 발표하셨지만 그 내용을 알아보고 따르려는 노력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보다 자신의 입장과 생각에 따라 하느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태가 더 자주 보이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르겠다는 신앙인들이 사랑이라는 단어의 달달한 어감은 받아들여도,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함께 결정해야 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대화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황님의 이미지는 쉽게 볼 수 있어도 그분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지요. 숙고 없는 판단과 책임 없는 주장 믿는 이들끼리도 정치 현안이나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알아보려고 하는 대신, 자신이 선호하는 특정 언론이나 소셜 미디어에 의존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만 해도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주요 후보들을 대상으로 대선 정책 질의서를 보내고 그 답변과 평가의견을 게시해서 신자들의 선택을 돕고 있습니다. 모든 자료는 무료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지요. 그런데도 신앙인들이 정치 이야기를 할 때조차 ‘유튜버 누가 그랬다더라’는 ‘카더라’ 식 뒷담화에 빠져 있거나 확인되지 않은 타인의 사생활을 거론하며 인권 의식의 빈곤을 드러내는 경우를 봅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주교회의 홈페이지에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교황청에서 발간하는 여러 문서들이 정기적으로 게시되고 있습니다. 무료 전자책으로 제공되고 있으니 누구나 뜻이 있으면 찾아 읽을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https://cbck.or.kr/Documents/Lessen 참조) 이렇게 신자들 사이에 대화를 돕는 자료들이 있는데, 왜 우리는 전혀 검증되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온라인판 전단지나 방송에 기대서 판단하고 말하는 걸까요?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주장을 하시는 분께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으셨냐?’ 고 여쭤보면 말꼬리를 흐리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우리 지역,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작년에 나온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회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은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는 정치 풍조를 지적합니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과장과 극단화와 양극화의 정치 메커니즘이 이용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존재와 생각할 권리를 부인하며, 이를 위하여 그들을 조롱하고 의심하며 가차없이 비난하는 전략을 씁니다.… 따라서 정치는 더 이상 모든 이의 발전과 공동선을 위한 장기 계획에 관한 건강한 토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파괴하면서 자원의 최대 효율을 이끌어 내려는 덧없는 마케팅 방법이 될 뿐입니다. 이기려고 다투는 이 저열한 싸움에서 토론은 논쟁과 대립의 상황을 유지하는 데에 악용되고 있습니다.”(「모든 형제들」, 15항)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정치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그리고 더불어 사는 것을 다루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이 모두 같은 이해관계와 같은 생각을 가진 단일한 존재라면 정치가 필요 없겠지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기 위해서, 더불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정치입니다. 정치가 없다면 이해관계가 부딪히고 입장이 다를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폭력뿐일 테지요. 나도 가지고 싶고 저 사람도 가지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누가 가져야 하는지 가려야 할 때 토론과 합의라는 방법을 빼고 나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결국 싸워서 이긴 쪽이 다 가지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건강한 토론을 통해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 정치의 묘미요 의미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정치의 본질을 벗어난 선전 선동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상대방 행위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절멸시키려고 달려들려는 악의에 찬 공격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가는 길 사랑은 달달한 연애 감정을 주고받는 것 이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1 요한 4,11) 하는 신앙인에게,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이요 서로에게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을 당신 창조의 동반자로 삼으셨고,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공생활의 시작부터 당신과 함께할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으며, 성령께서는 보호자로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입니다.(요한 14, 16 참조) 요컨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동반자로 삼으시고 함께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는데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랑은 반드시 서로 존중하며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며 실천해 가는 동반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 사회 회칙들은 그렇게 함께 의논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들을 신앙의 눈으로 살피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하나의 지침입니다. 이번 호부터 한 해 동안 이 지면을 통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모든 형제들」 회칙을 통해서 사회적인 문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회칙은 코로나19 사태를 통해서 또렷하게 드러난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면서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라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교황님의 메시지 속에서 우리가 꿈꾸어야 할 미래를 그리는 일을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월간빛, 2022년 4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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