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69. 인간적인 덕(「가톨릭 교회 교리서」1804~1811항)
완덕 이루려면 현명 · 정의 · 용기 · 절제 키워야 한다 ‘트롤리 딜레마’란 말이 있습니다. 기차가 브레이크 고장입니다. 그대로 가면 선로에서 일하는 인부 다섯 명을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 선로의 방향을 바꾸면 인부 한 명만 죽습니다. 방향을 바꾸시겠습니까? 다른 경우, 당신이 만약 육교 위에 뚱뚱한 사람과 함께 있습니다. 그 뚱뚱한 사람을 밀면 기차가 멈추어 인부 다섯 명은 죽지 않습니다. 그 뚱뚱한 사람을 밀겠습니까? 대부분 그건 살인이기에 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기차의 운전자는 방향을 바꾸어 한 사람을 죽이는 선택을 하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까? 중요한 것은 해답이 아닙니다. 무엇이 정의인지 ‘고민’하는 것에 있습니다. 교회는 ‘사추덕’(현명, 정의, 용기, 절제)에 대해 말합니다. 향주삼덕(믿음, 희망, 사랑)이나 복음삼덕(청빈, 정결, 순명)과는 달리, 사추덕은 순수한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되는 것”(1804)입니다. 그러니 신앙이 없어도 ‘고민’만 하면 누구든 키울 수 있는 덕들입니다. 따라서 평소 사추덕을 키워왔다면 그 사람은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사추덕에 무관심했다면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기복신앙으로 기울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현명’하지 못하여 지상 것을 청하게 되고, ‘정의’롭지 못하여 이기적인 것을 청하며, ‘용기’가 없어 사람들 앞에서 신앙인임을 부끄러워하고, ‘절제’하지 못하여 방탕한 신앙인이 됩니다. 그러니 사추덕에 관심이 없으면 신앙을 가져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찾으러 종을 보냅니다. 종은 자신에게 물을 주고 낙타 열 마리에게도 물을 주는 처녀를 주님께서 섭리하신 신붓감으로 알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레베카가 알지도 못하는 바로 그 종에게 물도 주고 낙타도 먹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레베카의 ‘현명’함을 봅니다. ‘현명’은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참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실행할 올바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실천 이성을 준비시키는 덕”(1806)입니다. 레베카는 참된 선이 무엇인지를 선택할 줄 아는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또 ‘절제’의 덕도 보입니다. 절제란 “쾌락의 유혹을 조절하고 창조된 재화를 사용하는 데에 균형을 유지하게 해 주는 윤리적인 덕”(1809)입니다. 그녀는 사랑 실천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희생하는 삶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정의’의 덕도 보이는데 정의는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1807)입니다. 레베카는 자신도 이웃에게 도움을 받으니 남을 돕는 것이 정의라고 여겼습니다. 마지막은 ‘용기’입니다. 외간 남자를 돕는다는 사람들의 시선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용기 있게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레베카는 이사악에게 자신을 인도할 아브라함의 종을 만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방박사들이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하늘의 별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평소에 자신들의 자리에서 이 사추덕을 키워왔기 때문입니다. 사추덕을 닦는 사람만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평소에 자기 삶의 자리에서 무엇이 현명함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용기인지, 무엇이 절제인지 고민하는 이라야 그리스도를 뵐 수 있는 ‘완덕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알기 전 당신을 바라는 이들만을 하늘의 별로 이끄십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5월 22일,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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