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듣는 ‘삼위일체’
각각이 실체이면서 전체… “사랑을 본다면 삼위일체 뵙는 것” - 발렌티노 로비시 ‘삼위일체 환시를 보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교회는 삼위일체를 믿고, 또한 삼위일체를 끊임없이 탐구해나간다. “하느님의 모든 계획의 궁극 목적은 모든 사람이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60항) 그러나 삼위일체는 “하느님 안에 감춰져 있어 하느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 가운데 하나”로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그저 막연하게 믿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으로도 탐구해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준 이는 히포의 주교이자 교부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이다. 15권에 달하는 성인의 「삼위일체론」은 「고백록」, 「신국론」과 함께 ‘하느님을 만나는 길’ 3부작으로 꼽히는 대작이다. 이 대작을 우리말로 옮긴 성염(요한 보스코)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집대성한 삼위일체론은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삼위일체론의 정본’처럼 생각할 정도로 중요한 가르침”이라면서 “성인의 삼위일체론에서 나타나는 ‘사랑’은 현대 사회교리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삼위일체론」(성염 옮김/1391쪽/6만5000원/분도출판사)에 담아낸 삼위일체에 관한 가르침을 들어본다. 성경에서 삼위일체를 살피다 예나 지금이나 삼위일체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였다. 교부 시대에도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 아들’과 ‘하느님 성령’을 배우고 “하느님이 셋이 아니고 한 분 하느님이시다”라는 말을 들으면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이들에게 성인은 성경의 말씀으로 삼위일체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성인은 먼저 성자가 성부와 한 분임을 밝히고, 성령도 한 분임을 가르치면서 삼위일체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아 나간다. 성부와 성자가 한 분임은 성경에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 성인은 이 구절이 “성자가 하느님이라고만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같은 실체라는 말도 하고 있다”면서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면 성부와 하나요 같은 실체”라고 설명했다. 이어 코린토1서를 인용해 성인은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1코린 6,15)로서 ‘성령의 성전’(1코린 6,19)이라면, 그리고 성령께 우리 몸을 ‘성전’으로 내드린다는 점에서 섬김을 바쳐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이 성령에 대해 말할 때 하느님께만 사용하는 서술어인 ‘섬김’을 사용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바오로 사도가 뒤이어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라고 말한 것도 하느님께만 드리는 섬김을 성령께 바쳐야 마땅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성인은 「삼위일체론」 1~7권에 걸쳐 성경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친다. 그러나 성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저 말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지성으로 삼위일체를 탐구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한다. 삼위일체의 모상 ‘인간’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성인은 이 말씀에서 ‘우리’를 눈여겨본다. 만약 성자 예수님의 모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면 “너와 비슷하게 너의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시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성인은 “사람에게 삼위일체의 모상이 생기고, 삼위일체가 바로 참된 한 분 하느님이시므로, 그로써 사람이 한 분이신 참된 하느님의 모상이 된다”고 해설한다. 인간이 곧 삼위일체의 모상이라는 것이다. 성인은 인간, 특히 지성의 활동을 외적인 부분과 깊숙한 내면에 이르기까지 통찰하면서 삼위일체의 모상을 찾아 나선다. 성인은 삼위일체를 직접 탐구하는 것보다는 “우리 지성의 나약함으로 미루어 아마 모상을 관찰함이 더 친숙하고 쉬울지 모른다”고 말했다. 성인은 특별히 ‘사랑할 때’를 성찰한다. 사람이 사랑하는 때에는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 ‘사랑’ 이 셋이 존재한다.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도 ‘사랑받는 이’도 나 자신이다. 그리고 ‘사랑’은 ‘사랑하는 이’와 연관된다. ‘사랑’을 빼면 ‘사랑하는 이’가 있을 수 없고, ‘사랑하는 이’가 없으면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서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셋은 단일한 실체지만, 혼합된 것이 아니다. 성인은 여기서 더 투명하게 삼위일체의 모상을 탐구하기 위해 인간을 ‘지성’에 국한해 살핀다. 그러면 ‘사랑하는 이’는 ‘지성’이 되고 ‘사랑받는 이’는 지성에 대한 ‘인식’이 된다. 성인은 지성이 자신을 사랑하면 지성과 사랑 역시 동일하다고 결론지었다. 성인은 “지성이 자신을 사랑하는 경우, 지성과 동등할 정도로 의지가 존재하고 사랑하는 이와 동등할 정도로 사랑이 존재한다”면서 “사랑과 지성은 두 개의 정신이 아니고 하나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지성이 자신을 사랑할 때 지성과 인식과 사랑은 각각 실체이면서도 각각이 모두 전체가 된다. 성인은 “지성은 자기 전체를 사랑하고 또 자기 전체를 인식하며, 자기 사랑 전체를 인식하고 자기 인식 전체를 사랑한다”면서 “셋은 분리되지 않은 채 존재하며 그러면서도 각체 역시 실체, 그러면서도 셋 전부가 함께 단일한 실체 혹은 존재”라면서 삼위일체의 모상을 해설했다. 삼위일체를 뵙는 법 ‘사랑’ 성인은 나아가 인간 지성의 구조를 ‘기억’, ‘오성’(悟性), ‘의지’로 도식화해서 더 분명한 삼위일체를 탐구해냈다. 그러나 성인은 “내 나름대로 상당히 큰 노력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느낀다”면서 “인간이라는 단일한 인격에서 저 지존한 삼위일체의 모상을 발견했음도 사실이지만, 이 셋이 삼위와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못했다”고 고백한다. 조가비로 바닷물을 뜨는 어린아이의 일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성인이 삼위일체를 탐구하던 어느 날 한 어린아이가 조가비로 바닷물을 떠서 작은 구덩이에 모두 옮기겠다기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자 어린아이가 “그럼 작은 머리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어떻게 알아들으려 하느냐”고 답하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는 일화다. 그러나 성인에게 삼위일체의 탐구는 우리가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이 되도록 초대하는 길이다. 성인은 인간이 본래 갖췄던 하느님의 모상이 본모습에서 죄로 인해 기형이 됐는데, 신앙과 은총을 통해 쇄신돼 간다고 가르친다. 성인은 사랑, 하느님이라는 관념이나 체험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그대가 사랑을 본다면 그대는 바로 삼위일체를 뵙는 것이다”라고 답한다. “우리가 당신께 이를 때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또 해도 이르지 못하는’ 그 많은 말은 멈출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만 남으시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도 끝없이 하나만을 이야기할 것이며 하나같이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당신 안에 우리 또한 하나 되어.”(아우구스티노 「삼위일체론」 15권의 마지막 기도 중) 도움주신 분: 성염 요한 보스코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가톨릭신문, 2022년 6월 12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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