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75. 죄의 다양성(「가톨릭 교회 교리서」 1852~1853항)
죄의 겉모습보다는 그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제가 한여름에 휴가를 받아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커다란 트럭 두 대가 충돌하였습니다. 뒤차가 앞차를 박았습니다. 두 차가 차선을 다 막아버려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워서 그런지 아무도 차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차에서 내려 도로에 떨어진 잔해를 치웠습니다. 저도 사제로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와 함께 길에 떨어진 잔해를 치웠습니다. 길을 치우다 깨져버린 스마트폰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주워서 사고 난 차량 앞으로 갔습니다. 뒤에서 들이받은 차는 심하게 부서져 있었고 운전자는 다리가 끼여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고통스러워하는 그 운전자에게 깨진 휴대전화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다친 트럭 운전자를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벌써 5분 이상은 지난 상태였고 제가 차로 돌아와 119에 신고하니 제가 첫 신고자였습니다. 차량이 수천 대 밀려 있었지만 한 명도 다친 사람을 위해 신고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와 함께 길을 치우던 사람이 자신의 차를 사고 난 차량 사이로 몰아서 빠져나갔습니다. 자기가 빨리 가려고 길을 치웠던 것입니다. 저도 차를 빼야 했기에 사고 난 차량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신고는 했기에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는 도중 경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현장에 함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지나쳐 가고 있었습니다. 매우 창피하였습니다. 저도 차에 끼여본 적이 있어서 그 아픔과 외로움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고 때 저만큼 선행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를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 중에 저만큼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없습니다. 겉모습만 볼 때 저는 의인입니다. 길도 치우고 휴대전화도 주워주고 신고도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보실 때는 가장 큰 죄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강론을 수백 번은 한 것 같은데 그냥 그 사람을 두고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죄는 너무나 다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의 죄를 판단할 때 겉모습만 보고 죄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장발장처럼 배고파서 빵 한 조각을 훔쳐 수년간 징역을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추앙받으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전쟁 상황에서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죗값을 치르지 않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일상에서는 사람에게 작은 피해만 줘도 죄를 묻습니다. 친구에게 욕을 하는 것이 상황에 따라 장난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부모에게 그러면 큰 죄가 됩니다. 따라서 죄의 겉모습보다는 그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의도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죄의 뿌리는 인간의 마음속에, 그의 자유의지에 있는 것입니다.”(1853) 선행처럼 보여도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아십니다. 마더 데레사가 가난한 이를 돌보고 있을 때 한 사제가 지나가며 미사에 가자고 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저는 지금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지나쳐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미사의 목적은 결국 사랑의 실천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어기는 게 죄입니다. 마음 안에서 내가 하는 행위의 의도가 과연 ‘이웃 사랑’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선행을 가장한 위선이나 다양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7월 3일,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