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79. 사회생활 참여(「가톨릭 교회 교리서」 1897~1927항)
우리가 공권력에 저항해도 될 때는? 예수님의 적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고 덫을 놓은 적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든 한쪽에게는 적이 되는 상황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태 22,21)라고 하십니다. 결국엔 나라를 빼앗은 국가에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인의 금품을 훔쳐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스를 주인에게 돌려보냅니다.(필레몬서 참조) 이렇게 하는 데는 바오로 사도의 이런 신학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로마 13,1) 베드로 사도 또한 노예 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인 여러분, 진정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뿐 아니라 못된 주인에게도 복종하십시오.”(1베드 2,18)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명백하게 세속의 권위에 대해서도 “복종의 의무”(1900)를 제시합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명에 따라 유다인들의 학살 주범이 된 아돌프 아이히만도 권위에 복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려운 딜레마에 봉착합니다.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리서는 그래서 공권력의 권위는 “도덕적 질서의 한계 안에서”(1923), 또 “사회 공동선을 꾀하려고 애쓸 때”(1921)만 유효하다고 가르칩니다. 해적선 선장의 말에는 굳이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권한을 주신 분도 하느님이시지만 사랑의 법을 주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았지만, 그 권위가 ‘인간에 대한 존중’(1907), ‘사회의 안녕’(1908), ‘인류의 평화’(1909)를 저해하는 명령을 내릴 때는 그 공권력에 반기를 들어도 된다는 뜻입니다. 만약 빈 라덴에게 순종하는 집단에 속해 있었다고 해 봅시다. 그 사람은 종교를 내세운 테러리스트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양심의 법에 모순됩니다. 종교의 자유를 주지 않는 것도 인간 존엄성이 존중되지 않는 것입니다. 낙태를 허용하겠다는 법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권위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공권력의 권위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를 때는 교회의 결정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치인이 아닌 교회를 믿는 신앙인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6·29선언 직전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겠다던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정치인들의 선동에 휩쓸리기보다는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는 편이 나중에 주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께서 파견하신 까닭에 교회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7월 31일,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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