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가톨릭 신학 (28) 믿음은 들음을 통해서(Fides ex auditu)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탈출 2,23) 고통의 소리, 기도의 소리가 하느님께 전해집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신 후 모세를 보내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왜 하느님께서 먼저 그들의 처지를 보시고, 그들이 울부짖기 전에 미리 도와주지 않으시고, 부르짖음을 듣고 나서야 도와주셨을까요? 우리의 어렵고 힘든 상황을 하느님은 잘 모르실까요? 하느님 뜻을 모두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우리 각자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평소 느끼기 어려울 수 있지만,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 알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고통스러울 때 많은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겨서 누리는 행복보다 큰 탈 없는 삶이 더 큰 행복일 수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어렵게 발견한 네 잎 클로버가 행운이라면, 늘 곁에 있는 흔한 세 잎 클로버는 행복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셨기에, 아무 일 없는 일상이 가능했고, 힘든 상황을 이겨낼 힘도 얻었습니다. 신앙에서 ‘듣는 것’은 중요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로마 10,17)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은 중요한 신앙 행위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 듣는 것을 무엇보다 중하게 여겼기에, 신명기 6장 4절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을 자주 암송하며, 머리와 가슴에 기억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만이 진정한 하느님이시니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언제나 어디서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는 하느님 백성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신앙 행위이고, 듣는 것의 중요성은 그리스도교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신앙이란 듣는 것이고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듣는 것과 보는 것은 하나로 결합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 결국에는 그분 얼굴을 뵙고자 하는 갈망과 연결됩니다. 특히 요한 복음서에 신앙은 듣는 것이며 보는 것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들처럼(요한 11,45 참조), 예수님 행적을 보는 것은 믿음에 선행합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는 말씀처럼 믿는 것과 보는 것은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첫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고백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제자들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라는 결정적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을 보여주고 비춰주는 빛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앙의 빛’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6) [2022년 8월 7일(다해) 연중 제19주일 서울주보 4면, 조한규 베네딕토 신부(가톨릭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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