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영상교리] (17) 세례성사 ① 의미
세례,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남 우리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 친교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며, 다른 성사들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례를 기억하고 세례성사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성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례의 의미 세례는 ‘물에 담그다’, ‘물에 잠기게 하다’, ‘물로 씻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물에 잠기었다가 나오는 예식이었지만, 점차 머리에 물을 붓는 예식으로 간소화됐습니다. 물로 ‘씻음’은 몸의 더러움을 없애고 마음을 정화시키고 죄를 깨끗이 용서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에 ‘잠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 됨을 상징하는데요. 물에서 나오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물은 세례성사의 표징입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모든 죄를 용서받아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세례식 때 사제는 영세자의 이마에 물을 세 번 부으며, 또는 물에 잠기게 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베풀어지는 세례성사는 세례받는 이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표지인 인호가 새겨집니다. 그래서 세례성사는 일생에 한 번만 받을 수 있고 취소될 수 없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는 또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며 하느님께서 부르실 이름도 새롭게 짓게 됩니다. 이를 세례명이라고 하는데요. 세례명은 평소 존경하고 좋아하는 성인이나, 그 외 ‘노엘’, ‘임마누엘’, ‘그라시아’처럼 그리스도교의 신비나 덕을 나타내는 이름으로도 정할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는 주교나 신부, 또는 부제가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긴급한 상황에서는 평신도뿐 아니라 비신자라도 가톨릭교회의 뜻을 따를 지향이 있다면 누구나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 다만 이때는 교회가 정한 양식을 따라야 합니다. 세례받을 사람의 이마에 자연수를 부으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누구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급한 상황에 주는 세례를 ‘임종 세례’[대세(代洗)]라고 합니다. 세례는 신앙생활의 시작 그런데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이 완성되는 걸까요? 세례는 끝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시작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1베드 3,21)라고 했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셨고,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최고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참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부활 성야 때 세례 서약을 새롭게 하면서 하느님을 섬길 것을 다짐합니다. 세례 서약 갱신으로 마귀와 유혹을 끊어버리고, 신앙을 다시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를 고취시키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로 우리는 또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로써 성령과 함께 살게 됐지만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기에는 아직 미흡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만들어 줄 성령의 선물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총을 받는 견진성사입니다. 그래서 견진성사는 세례성사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아멘. ▶ 가톨릭 영상교리 보기 https://youtu.be/Owxvm-ETLYI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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