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191.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60항)
구원의 봉사자인 교회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안에 있다 비신자1: “야당을 보면 참 한심해요! 맨날 정쟁을 일으키잖아요!” 비신자2: “그게 어떻게 야당 잘못이야! 집권당 잘못이지!” 비신자3: “비판은 좋은데 다들 진정하세요! 이러다 싸움 나겠네요!” 비신자4: “비판은 무슨, 저런 종북세력에겐 비판도 과분하지!” 비신자5: “우리가 종북세력이면 너희는 친일파, 토착 왜구냐?” 마리아: “…….” 어른으로서의 죄책감 시간이 빠르다고 느끼면서도 정작 그 시간 속에서 내가 어떻게 영글어 가는지도 모르고 사는 요즘입니다. 어떤 일간지에서 ‘썩은 어른들의 시대’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어른답지 않은 어른이 많을 때 그 참담함을 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불혹, 나이 마흔에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인데요. 그러나 내가 그런 어른인지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지난 몇 년간 사회교리 해설 원고를 써 왔고 그 주제는 가톨릭교회가 지향하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사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유심히 봐야만 했습니다. 귀감이 될 만한 아름다운 일들, 그래서 아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썼으면 좋았을 텐데, 문제와 갈등이 붉어지는 사회 현안을 먼저 다루었습니다. 아파하는 현장과 이웃에 대한 우선적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증거하는 이들 최근 지인들을 만나면 사회에 대해 낙관적인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목숨이 상하는 일도 많고 굵직한 악재들도 걱정입니다만 핵심은 정치권의 갈등입니다. 대통령과 집권당에 협조하지 않는 야당을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여당을 불신한 나머지 다시 촛불을 들고 주말마다 거리로 나가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방법과 생각이 다르나 양자 모두 국가와 사회,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리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신부님, 가련한 분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어요” 하시며 무연고로 사망하신 노숙인들, 길거리에서 걸식하는 이들을 위해 늘 기도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일했던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직원들은 산재사고로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막기 위해, 서울역 등지에서 시민들의 관심을 부탁하는 서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 때문입니다. 선의를 갖고 복음과 신앙을 증거하는 분들입니다. 존재하는 사랑, 이끄시는 하느님 비록 혼란스럽지만, 사회에는 사랑과 따스함이 있습니다. 갈등과 분열로 치닫는 것 같지만 협력하고 존중하고 손잡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구원의 역사도 그러합니다. 늘 어려움과 환난이 있었고, 수많은 크고 작은 제국이 흥망성쇠 했지만 하느님을 따르는 지상의 신앙공동체는 섭리와 이끄심 속에서 항구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여전히 금도(襟度) 없는 날선 반목과 어려움은 있을 것입니다. 식언(食言)과 기만(欺瞞)은 우리를 실망시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기(修己)하고 기도하며 이웃과 세상을 살피는 현인(賢人)들, 불혹과 지천명, 이순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지혜가 있고,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이들이길 희망합니다. “구원의 봉사자인 교회는 추상적 차원이나 단지 영적 차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과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 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고 하느님 계획에 협력하도록 부름받는다.”(「간추린 사회교리」 60항) [가톨릭신문, 2022년 11월 6일, 이주형 요한 세례자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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