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 상징 읽기] 숫자 40에 담긴 뜻 - 노아의 방주. 교회의 모든 축일 중에서 가장 큰 축일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심으로써 인류 구원 성업을 완수하신 사실을 기리고 경축하는 주님 부활 대축일이다. 교회는 이 기쁘고 성대한 대축일이 다가오면 일정 기간을 정해 신자들이 이 대축일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배려하고 격려한다. 그러기에 신자들이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묵상하며 감사드리고, 지은 죄를 뉘우치고 속죄하며 지내게 되는 이 시기는 매우 거룩한 시기며 또한 신비로운 시기다. 오늘날 교회는 주님 부활 전 40일을 그런 마음가짐으로 지내며, 그래서 이를 사순시기라고 한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그 결과에 힘입어 전례를 개혁하기 전까지는 주님 부활 전 70일을 그렇게 지냈는데, 이를 칠순시기(예전 표현으로는 ‘칠순절’)라고 했다. 여기서 70이란 숫자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그분께 죄를 지은 탓으로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종살이를 했고, 70년이나 되는 종살이 끝에 마침내 정화되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와 저 옛날처럼 다시금 과월절을 기념하게 된 사실을 상기시킨다. 40, 징벌과 고난을 뜻하는 숫자 이제 교회가 새로운 과월절을 지내려는 우리에게 제시하는 숫자는 40이다. 초기 교회의 빼어난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성경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일을 맡아 수행한 성 예로니모(347-419년)는 일찍이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40이란 숫자를 눈여겨보았다(에제 29장 참조). 그리고 이 숫자를 죄를 짓고 하느님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과 그 징벌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징벌의 숫자로서 40에 대해서는 또한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일을 후회하실 정도로 실망하시고 진노하셔서 40일 동안 밤낮으로 비를 내리신 일을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창세 7,12 참조). 그때 하느님께서는 오직 한 가족만을 남기시고 모든 인류를 없애셨다. 또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번번이 하느님을 배신한 까닭에 그분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양을 치며 떠돌아야 했던 일도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민수 14,33 참조). 그만큼 인류의 죄는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나머지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을 감내함으로써만 탕감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루살렘에 멸망을 가져다줄 포위 공격에 대한 예표로,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하루를 한 해씩으로 쳐서 40일 동안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워서 유다 집안의 죄를 짊어지라고 하느님께서 명하신 일도 기억해낼 수 있다(에제 4,6 참조). 이렇게 인류는 고난을 겪음으로써 다시금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 시나이 산에 오른 모세(좌), 엘리야 예언자. 40, 고난이 수반되는 준비를 뜻하는 숫자 그런가 하면,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을 가까이서 뵌 인물 두 사람을 만날 수 있다. 한 사람은 율법에 기반을 두고 살아가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인물인 모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예언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살아가던 시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인물인 엘리야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탈출 24,18 참조), 엘리야는 호렙 산에서(1열왕 19,8)에서 하느님을 뵈었다. 당시 사람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하느님을 뵙거나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죽는 줄로 여겼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하느님을 바로 앞에서 뵈었는데도,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아주 가까이에서 들었는데도 죽지 않았다. 마음 졸이며 두려워하고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 가까이에 있어도 큰일을 당하지 않도록 허용된 것이다. 그때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나이 산에 이르러 40일을 밤낮으로 그곳에서 지냈다. 그리고 엘리야는 40일을 걸어서 호렙산에 도착했다. 이 40일은 두 사람이 하느님을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데 필요한 기간이었다. 하느님을 뵙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호의를 얻어내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이를테면 이 기간은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준비로서 40일 동안 단식을 해야 했다.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 식욕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또한 본능적인 욕구들 가운데 하나인데, 이 욕구를 절제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에 성경학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중대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기에 앞서 그 준비로써 고난이 수반되는 단식을 실행했다고 풀이한다. -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먼 훗날,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로써 이 고난이 수반되는 단식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도 또한 받아들이셨다. 그분은 마침내 인류 구원의 소명을 이루시고자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시기에 앞서 광야로 가셨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기도하시고 단식하시며 그 큰일을 완수할 준비를 하셨다. 그때 그분은 배고픔의 고통을 겪으셨고, 돌을 빵으로 변하게 하라는 유혹까지 받으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배고픔쯤이야 쉽사리 해결하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그런데 왜 굳이 그토록 힘들게 참고 견디려 하시느냐는 꾐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이 신비스러운 사실들을 통해서 우리는 중요한 점 몇 가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셔야만 했는지, 왜 단식의 고통을 겪고자 하셨는지, 왜 그 기간으로 40일을 선택하셨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순시기라는 기간은 그 자체의 엄숙하고 신비로운 특성을 바탕으로 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진노를 가라앉혀 드릴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을 단련하며 정화할 수 있게 하는 놀라운 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고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의 되살아나심을 맞이할 준비를 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온 교회가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작은 세상을 넘어서 멀리 바라보며,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40일 동안의 참회와 속죄를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마음 상하신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로 준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아가 저 옛날 니네베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저마다 자신이 드리는 속죄의 제물을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받아들이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2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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