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 뭡미꺼?]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번 시간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전적 정의(定義)보다는 신학적 의미(意味)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 역사 안에서 수많은 성인들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하느님’에 대해 물어봅니다.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디) 계십니까? 만일 계신다면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원하는 시점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이성의 빛’만으로 완전히 알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적 이해와 표현을 무한히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 자체를 묘사,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렇듯 눈으로 볼 수도, ‘이성의 빛’을 통해 말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는 왜 그리도 찾고 있을까요? 특히 불행, 슬픔, 고통 그리고 크고 작은 실패라는 시련들로 삶의 가장 힘든 순간을 겪을 때,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하며 탄식하는 바로 그 순간들조차도 우리는 ‘왜’ 하느님을 찾고 그분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일까요? 삶 속에서 하느님을 찾고, 동시에 하느님께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나 자신을 각성(覺醒)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 즉 신학’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얻게 되는 것은 그저 나의 교리 지식만이 아니며, 누군가가 나에게 전해주는 말이 아니기에, 단지 남이 만났던 하느님을 부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나를 통해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분의 존재를 느끼거나, 믿거나, 고백하고는 있지만, 자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을 때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신 분이라 고백하면서도, 또는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기에,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수록 참담한 현실에 대해 원망과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부재(不在)에 대해 한탄(恨嘆) 하곤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느님의 엄한 면, 전지전능한 면, 심판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그분의 심판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하느님을 대하기 두려운 분으로 고백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하느님에 대해 ‘불의를 꺾으시고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시는 분, 자비로우신 분, 특히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우리가 밝히고 싶은 어떤 분이시지만, 동시에 내가 희망하고 동경하는 것을 체험하길 원하는, 동시에 체험하게 해주는 깊은 신비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다 아는 것도 아닌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렇게 감추어진 신앙의 신비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2항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계시로써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 하느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우리를 항상 돌보시는 분이며, 벗을 사귀듯이 우리와 대화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해 주시는 인격적인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 복음서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가난한 이들, 창녀들, 죄인들과 어울리시면서,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나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통해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잘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특히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카 11,15-32)에서의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 우리의 죄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고자 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느님은 ‘나(여러분 각자)’에게 누구십니까?” 각자 삶에서 하느님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내가 살아가는 힘이고, 원리이기에 신앙의 대상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내 삶의 모든 것, 생각과 말 그리고 가치들을 하느님께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信仰)이고, 신학(神學)이 추구하는 길입니다. [2023년 3월 5일(가해) 사순 제2주일 가톨릭마산 3면, 변종원 요셉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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