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 상징 읽기] 벌어진 석류 열매, 주님 부활의 상징 - <성모자>, 크리벨리 그리스 신화와 석류 그리스 신화에 제우스의 딸 페르세포네가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신 하데스에게 납치된 이야기가 있다. 페르세포네의 어머니이자 땅의 생산력을 관장하는 여신인 데메테르는 딸을 잃은 슬픔에 땅이 어떠한 소출도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데메테르는 페르세포네를 돌려보내라고 제우스에게 강력하게 요청했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하데스에게 보내 페르세포네를 돌려보내라고 했다. 그런데 페르세포네가 저승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면 돌려보내고, 이미 먹었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을 붙였다. 이를 알게 된 하데스는 꼼수를 써서 페르세포네에게 석류를 먹게 했고, 결국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데메테르의 요청이 워낙 강경했다. 제우스는 페르세포네가 땅이 황폐해지는 가을과 겨울에는 저승에서 지내고 나머지 기간에는 이승에서 지내도록 있도록 중재했다. 그리하여 페르세포네는 해마다 봄이 오면 어머니에게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석류는 죽음과 소생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교회와 석류 교회는 일찍부터 석류를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했다. 석류 열매의 몇몇 특징들이 그리스도를 표상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령, 공처럼 둥근 열매의 배꼽은 마치 그리스도의 왕직을 가리키는 왕관처럼 생겼다. 검붉은 껍질이 벌어지면 씨앗을 감싼 과육에서 나오는 핏빛 과즙은 인류 구원을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성혈처럼 보였다. 그리고 벌어진 껍질은 부활 대축일 새벽에 열린 그리스도의 무덤, 곧 죽음을 극복하시고 되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낸다고 여겨졌다. - <석류를 드신 성모>, 프라 안젤리코
석류는 이렇듯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중세기 성미술에 널리 사용되는 소재가 되었다. 화가들은 성모님의 무릎에 앉은 아기 예수님을 그릴 때 종종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하는 상징인 석류를 손에 드신 모습으로 묘사했다. 예컨대 카를로 크리벨리(Carlo Crivelli, 1430-1493년)가 그린 ‘성모자’는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이 장차 그분에 의해 인간이 얻게 될 구원 약속의 상징인 석류를 손에 드신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0(~95)-1455년)가 그린 ‘석류를 드신 성모님’에는 성모님이 껍질이 벌어진 석류를 손에 드시고, 아기 예수님은 그 석류의 피처럼 붉은 씨앗을 한 움큼 움켜쥐신 모습을 보여 준다. 이는 그분이 장차 인류를 위해 고통을 겪으시고 피를 흘리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여기에 아기 예수님이 자신의 수난과 부활에 긴밀하게 참여하실 어머니에게서 그 열매를 받으신다는 한층 애절한 상징성도 더해진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러서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이 널리 퍼지면서부터는 이 짙은 붉은색 열매는 그 모양과 색깔 때문에 예수님의 성심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신대륙에까지 전해진 석류 석류는 스페인의 도시 그라나다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라나다(granada)라는 단어는 스페인어로 석류를 뜻하는데, 어떤 이들은 도시의 이름이 이 과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믿는다. 그라나다는 라틴어로 ‘씨앗’을 뜻하는 그라눔(granum)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다른 이들은 아랍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영어로 ‘석류’를 뜻하는 단어 포미그래니트(pomegranate)는 라틴어로 ‘사과’를 뜻하는 포뭄(pomum)과 ‘씨앗’을 뜻하는 그라눔이 합쳐진 것이다. - 그라나다 시의 문장(좌)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수도회 표장
곡절이 어떠하든,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드 왕이 1492년에 그라나다에 있던 이슬람의 마지막 요새를 점령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다. 그들은 그때 이 지역을 표상하는 문장(紋章)에 석류가 추가된 것을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겼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시작된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수도회’ 또한 석류, 곧 ‘하느님의 열매’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그런 연유에서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새로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에도 석류를 소개했다. 스페인의 선교사들이 석류의 씨앗을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텍사스 등지로 가져갔고, 이 지역들에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석류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구약시대와 석류 석류는 구약성경에도 나름의 상징성을 지닌 열매로 여러 차례 등장한다. 석류는 일찍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약속의 땅에 대해 말씀하실 때 거론된 열매들에 포함되었다. “(그곳은) 밀과 보리와 포도주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이며 올리브기름과 꿀이 나는 땅이다.”(신명 8,8)
- 유다교의 사제복 스케치 석류는 또한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온 대원들이 아직 광야에서 방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져온 열매들에도 포함되어 있었다(민수 13,23 참조). 그런가 하면 솔로몬은 아가서에서 사람의 관자놀이(우리말 성경에서는 ‘볼’)를 석류에 비유했다. “너울 뒤로 얼보이는 그대의 볼은 석류 조각 같다오.”(4,3) 그리고 석류는 대사제 아론이 성소에서 예식을 거행하러 제단으로 나아갈 때 입어야 할 옷을 만드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지침에도 나온다. “그 겉옷 자락 둘레에는 자주와 자홍과 다홍 실로 석류들을 만들어 달고, 석류 사이사이에는 돌아가며 금방울을 달아라.”(탈출 28,33) 이스라엘 사람들은 석류에는 모세오경에 나오는 계명의 수인 613개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사제 아론은 율법을 상징하는 석류로 장식된 전례복을 입은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 왕은 성전에 청동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기둥 꼭대기의 기둥머리를 덮을 그물에 석류를 달았다.(1열왕 7,18 참조) 석류 열매가 성전과 이스라엘 백성을 수호하는 율법을 상징하는 데 사용된 것이다. 새로운 해석: 하나의 권위 아래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 - 석류와 금종 디자인 그러나 옛 율법은 구세주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법으로 대체되었다. 그러기에 비록 중세 시대의 전례복들과 제대포들에서 수놓아져 있는 석류를 종종 볼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이제 새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열매 하나에 많은 씨앗을 품은 석류는 하나의 권위 아래 많은 사람이 모여 일치를 이루는 교회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가톨릭 신자들은 하나의 참된 교회 공동체 안에 안전하게 받아들여지고 그 안에서 결합된다. 그리고 사제 –제2의 그리스도– 는 제단에서 이 공동체를 대표한다. 이렇듯 깊은 석류의 상징성과 의미를 알면, 이제 교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석류가 새삼스럽게 보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을에 익어가는 열매지만, 이른 봄 주님 부활 대축일에 그 풍부한 상징성을 알아가게 될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4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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