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 상징 읽기] 가상칠언에 대한 또 하나의 풀이 복음서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일곱 마디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일곱 마디의 말씀, 곧 가상칠언(架上七言)은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고도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를 주제로 묵상해 왔다. 그 많은 이들 중에 아그레다의 마리아(Mary of Agreda, 1602-1665)가 있다. 17세기 스페인의 수도자이자 신비가였던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에 대하여 일련의 환시들을 체험했고, 그렇게 체험한 환시 내용을 글로 써서 ‘신비로운 하느님의 도성(The Mystical City of God)’이란 책을 만들었다. 그 시절은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와 공동 구속자로 인식되던 때였고, 그러했기에 이 책에는 책 제목만으로는 선뜻 알아차릴 수 없지만, 다분히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는 성모 마리아의 면모들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가상칠언과 관련해서도 그러하다.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아그레다의 마리아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던 동안, 으뜸 악마인 루치페르와 그의 졸개 악마들은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신지를 확실하게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루치페르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그리스도를 수행하던 베드로 사도가 그분의 신원에 대해 고백했을 때도, 그분께서 죽은 라자로를 되살리신 다음에도 여전히 그분의 신원에 대해 크게 의심했다고 한다. 그분이 예사롭지 않으신 분이라는 것은 진즉 알았지만 참 하느님이시리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루치페르는 교만했기에 천사도 아닌 인간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위격적으로 하나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했기에 루치페르와 그의 졸개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어깨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음을 향해 가시는 장면을 보는 순간 도망쳐서 차라리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싶은 압도적인 충동을 느꼈다. 그들은 그분이 참으로 예사 사람이 아니며 더욱이 끝내는 자기들을 궤멸시키실 분이라는 위기감마저 느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 파멸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성모 마리아의 명에 의해서 그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파멸의 장소인 골고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말씀은 악마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들은 천사들과 악마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의 권능으로써 악마들을 굴복시키셨다. “그분은 악마들에게 골고타로 가서 십자가 주위에 서 있으라고, 그곳에서 꼼짝 말고 인간은 구원되고 그들은 멸망하는 위대한 신비의 결말을 지켜보라고 명하셨다.”라고 아그레다의 마리아는 말한다. ‘사람의 아들’에게 저 옛날의 용이 굴복하도록 하늘이 정한 순간이 마침내 다가왔으니, 악마들이 자기들의 패배와 멸망을 지켜보며 극도의 혼란과 놀라움을 맛보도록 성모 마리아께서 명하신 것이다. 아그레다의 마리아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한마디 한마디 말씀하실 때마다 그 말씀 하나하나에 담긴 악마들의 파멸과 관련된 신비들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이 어둠의 세력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첫째 말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 말씀으로 마침내 악마들은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청원하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점을 확실하게 그러나 고통스럽게 깨닫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확인과 더불어 혼란에 빠진 악마들은 다시금 온 힘을 다해 지옥 깊은 곳으로 몸을 던졌고, 다시금 자기들이 결국에는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둘째 말씀: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43)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회개한 죄수에게 하신 것이다. 이 말씀으로써 악마들은 거룩한 신성과 결합된 가장 거룩하고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얻어내신 공로를 통해 인간이 죄를 용서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이제부터는 그분의 죽으심에 힘입어 인간이 구원될 수 있으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제 원죄로 말미암아 닫혔던 낙원의 문이 다시 인간에게 열리게 된 것이다. 루치페르는 이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운 나머지 성모 마리아께 자기가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도록, 주님의 수난 현장에서 벗어나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애걸했다. 셋째 말씀: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악마들은 성모 마리아가 하늘에서 장차 자기들의 머리를 짓밟을 여인으로 선포되신,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로써 악마들은 스스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성 요한 사도에게 사제의 직능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그제야 악마들은 최후의 만찬 때 사도들에게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재현할 직능을 맡기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악마들은 그제야 성 요한 사도가 복음사가로서의 직능뿐만 아니라 구세주 그리스도의 품위와 직분에 참여함으로써 받는 사제로서의 직능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본 것이다. 넷째 말씀: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이 말씀은 악마들에게 인간에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사랑을 드러내 보였다. 이를테면 성부 하느님께서는 헤아릴 수조차 없도록 크신 당신의 사랑을 완전하게 펼쳐 보이시기 위해 성자 하느님의 신성을 그분의 가장 거룩하신 인성에 신비로운 방식으로 결합하셨고, 그런 다음에는 극도의 고통을 당하시게 하심으로써 가장 풍성한 결실을 내실 수 있도록 섭리하셨음을 보여 주셨다. 인간이 그토록 하느님께 사랑받는 복된 존재라는 점은 루치페르와 그의 졸개들의 시기심을 더욱 키웠다. 다섯째 말씀: “목마르다.”(요한 19,28) 이 말씀은 악마들에게 자기들이 철저히 실패했음을 알게 해주었다. 악마들은 이 말씀으로 사실상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위한 당신의 사랑을 아무리 베풀어도 흡족해하지 않으시리라는 점과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라면 더 많은 고통도 마다하지 않으시리라는 점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했다. 여섯째 말씀: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이 말씀을 들은 루치페르와 그의 졸개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곧 그분의 강생과 구속의 신비가 성취된 것으로 이해했다. 일곱째 말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이 마지막 말씀과 더불어 악마들을 단죄하고 영원한 심연으로 되돌려보낸 주님의 위대한 선고가 내려졌다. 그런 다음 루치페르와 모든 악마가 지옥의 가장 깊은 곳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아그레다의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루치페르와 그의 졸개들이 인간을 유혹하는 힘은 미약해졌다. 인간이 다시는 죄악과 자유 의지로써 악마들을 풀어주지 않고 그들에게 다시 이 세상을 파괴하러 돌아올 빌미를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5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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