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20. 열 번째 계명(「가톨릭교회 교리서」 2534~2557항)
탐욕은 사랑받고 싶은 욕구의 어긋난 표현 - 조앙 제페리노 다 코스타 ‘과부의 헌금’. 재물에 대한 애착은 하느님의 행복을 누리게 될 때 충족된다. 마지막으로 십계명의 “열째 계명은 탐욕과 세상의 재물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을 금합니다.”(2536)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행동’에 집중된 계명이 주를 이룬다면, 후반부는 거짓말하려는 마음과 음탕한 마음, 그리고 탐욕의 ‘욕망’들에 집중됩니다. 물론 “욕망들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2535) 그러나 이러한 욕망들이 합리적인 한도를 넘어서면서 우리의 것이 아니고 타인의 것이거나 마땅히 타인에게 주어야 할 것을 부당하게 탐내도록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욕망을 제어하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요? 불가능합니다. 행동으로는 그렇게 흉내낼 수 있어도 감정이나 욕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없음을 알아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로마 3,20)라고 말합니다. 결국 죄는 욕망에서 시작하는데 인간을 사랑하셔서 내어주신 그리스도가 아니면 교만과 음욕과 탐욕의 욕망이 통제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탐욕은 사랑받지 못해서 통제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나친 욕망은 사랑받고 싶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의 어긋난 표현입니다. 탐욕은 불안이 양식입니다. 불안하면 생존 욕구가 커집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부모가 싸우고 이혼하고 학대하여 아이들이 불안 속에서 자란다면 그 아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기 생존을 책임져야 해서 소유욕과 식욕, 성욕과 지배욕이 커집니다. 반면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녀들은 욕심낼 필요가 없이 자랍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은 유령들에 의해 보이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장면을 통해 회개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과거의 스크루지는 사랑받지 못한 외로운 아이였고 부에 대한 집착이 커지면서 사랑을 잃는 청년이 되었습니다. 스크루지는 돈이 없어도 가족 간의 단란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는 자기 점원 가족을 보며 부러워합니다. 자신은 돈이 행복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 자신의 쓸쓸한 죽음을 봅니다. 사랑받은 사람도 탐욕스러울 수 없습니다. 사랑받고 싶은 사람도 탐욕스러울 수 없습니다. 사랑과 탐욕은 상반된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본보기”(2544)를 제시하십니다. 그 과부는 가난하지만, 하느님께 아끼지 않습니다. 하느님만 있으면 됩니다. 부모만 있으면 되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므로 행복합니다.”(2547)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 나라를 선악과를 소유하려고 포기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 외아드님까지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 욕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갈라 5,24 참조) 하느님을 잉태하시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던 성모 마리아께서 돈에 집착하고 성욕에 집착하고 권력에 집착한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현세 재물에 대한 무절제한 애착은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행복을 누리게 될 때 충족됩니다.… 하느님을 뵙는 사람은 이 보는 행위 안에서 좋은 것을 모두 얻은 것입니다.”(2548) 다 가진 사람은 더 원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무절제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3년 6월 4일,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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