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17] “저승에 가시어” : “하느님은 어디까지 함께 계실까?”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돌아가심에 이어 ‘저승에 가심’에 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에 근거하는데요, 오순절 설교에서 베드로 사도는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라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러 충만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사도 2,24-28 참조)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으므로 죽은 이들에게 가신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에게 당연했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죽은 이들과 함께 계셨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셨음은 바오로 서간에서 예수님을 ‘땅의 낮은 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켜진 분이라고 고백할 때에도 전제되어 있습니다.(로마 10,7; 콜로 2,12 참조) 그럼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서는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3,19) 하셨고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4,6)라고 전합니다. 이 때문에 종종 이 상황을 그린 성화에서 예수님은 개선장군처럼 힘차게 묘사됩니다. 그러셨을 것 같기도 하지요? 한편 신학자 중에서는 저승에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세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성자께서 인간 죽음의 모든 법칙에 스스로를 적용시키셨다고 보았고, 성 이레네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상태를 취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셨는데 이는 저승에 가게 되는 단계도 포함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그가 우리의 악행을 짊어졌고, 우리의 고통을 참아 받았다’고 한 이사야서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죽으셔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저승에서 구하시기 위해서는 저승에 내려가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교부들의 이런 말씀은 저승에 가신 예수님을 개선장군처럼 이해하기보다는 저승에 있는 인간들과 같은 처지에 계셨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죽은 이들이 머무는 곳인 ‘저승’은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느님과 어떤 친교도 없는 상태입니다. “저승에서 누가 당신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6,6) “저승은 당신을 찬송할 수 없고 죽음은 당신을 찬양할 수 없으며 구렁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당신의 성실하심에 희망을 두지 못합니다.”(이사 38,18)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셨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취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죽음과 그 결과인 죽음 이후의 상태까지 당신 것으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승에 가시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지’를 드러냅니다. 사람으로서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그분도 겪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이 왔습니다. 사실 하느님이신 그분이 이렇게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곧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이렇게 보면, 저승에 계신 예수님을 개선장군으로 볼지 말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든 거기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아닐까요? ‘저승에 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입니다. [2023년 6월 18일(가해) 연중 제11주일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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