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19]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2) : 예수님이 옳으셨다!! 혹시 그리스도인이 아닌 청년들에게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해 보신 적이 있나요? 예수님의 말씀, 치유 기적, 사람들을 대하시던 태도 등등은 청년들에게도 분명 매력적입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젊은이들이 예수님의 지혜, 사람에 대해 가지셨던 동감과 사랑에 매료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비참한 죽음입니다. 지금처럼 청년, 장년, 노년 할 것 없이 삶의 고단함을 호소하는 상황에서 그분의 한없이 무력하고 비참하기만 한 죽음은 “예수님처럼 살아볼래?”라는 초대 앞에 아마도 사람들을 망설이게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인품을 가지셨던 것은 좋은데, 그래서 뭐란 말인가요? 그분은 결국 인생의 실패자 아닐까요?” 예수님은 분명 우리에게 위로와 평화,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내게 이러저러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쩌면 나를 위한 ‘행복 자판기’로 여겨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에는 구원받고 행복한 것도 당연히 포함됩니다만, 내가 정말 그분을 받아들인다면, 그분이 살았던 삶의 방식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분처럼 사람을 대하고, 사람을 돌보고, 필요하다면 내 것을 내어주고 좀 더 나아간다면 나를 희생할 수 있는 것까지도 포함하겠지요.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우리를 보고 또 누군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전해지는 방식이고요.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의 ‘인간적인 끝’이 예수님처럼 죽는 것이라면, 어쩌면 우리의 신났던 발걸음은 잠시 멈칫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정말 끝이라면요. 부활은 이것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심으로써 하느님은 그분이 옳았다는 것, 그분의 생각, 삶의 방식, 죽음에 이르도록 충실하게 지향했던 것, 그것들이 모두 참으로 옳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 사건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근본 동기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가르침, 지상의 것들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더 귀한 가치가 있다는 것, 우리의 인간적 판단을 넘어 끊임없이 하느님의 판단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 그래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고 애쓰고 그 뜻이 실현되도록 기도하며, 그것에 나를 필요로 하신다면 기꺼이 내어드리는 것 등등, 이런 예수님 삶의 방식이 옳았다는 것의 확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의 의미는 ‘인간적인 끝남’ 너머로 우리의 시선을 던져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닌 거지요. 그리고 그 정말 ‘끝날 때’란 바로 하느님만이 개입하실 수 있는 바로 그때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도 된다는, 그것이 옳다는 것의 보증입니다. 그래서 발터 카스퍼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신앙은 단순히 자연법칙을 깬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기적 사건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답이라고, 그래서 예수님 부활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에 부록 같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신앙의 집약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에 기초합니다.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요, 토대입니다. [2023년 7월 2일(가해)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서울주보 5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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