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교리] 사말교리 (2) 심판 : 하느님의 ‘정의’와 ‘은총’이 함께 이루어지는 시간 ‘죽음 후에 무엇이 찾아오는가?’ 이 물음에 가톨릭교회는 상선벌악의 원리(삶의 모든 행실에 따라 상 또는 벌을 받음)에 따라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심판은 죽음 후에 즉시 받게 되는 ‘개별 심판’(사심판)과 사도신경에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듯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공심판)으로 이루어진다. 보통 ‘심판’하면 어떤 생각과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어쩌면 심판을 유사종교들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파멸로만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심판이 우선적으로 ‘하느님과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심판 교리는 우리 모두에게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현재 삶을 바로 잡는 기준”이요, “양심의 소리”(『희망으로 구원되는 우리』 41)로서 우리가 “더욱 진지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촉구”(『죽음 · 심판 · 지옥 · 천국』 24)하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에서 심판의 궁극적 의미는 “정의이며 또한 은총이기 때문에 희망”(『희망으로…』 47)으로의 초대이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악이 선을 이기는 것처럼 보여지는 불의에 가득 찬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작가의 고백처럼 ‘정의와 진실은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할지라도, 긴 역사 속에서 승리하는 법이다’(조정래). 곧 이 땅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잘못과 불의에 대한 심판은 분명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이루어진다. 다만 여기서 심판은 단지 이 땅에서 밝혀지지 않은 죄와 잘못만이 아니라, 숨겨져 있었던 선의와 의로움 역시도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느님의 정의가 명백히 드러나는 심판은 누군가에게는 두려움 속에 “수치를, 영원한 치욕”(다니 12,2)을 감당해야 할 시간인 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희망 속에 하느님의 위로를 받는 복된 날(마태 5,3-12 참조)이 될 수 있다. 또한 심판은 하느님의 정의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분의 은총을 통해 함께 이루어진다. 그러니 심판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정의와 은총을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죽음…』 29 참조). 사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후에도 연속되는 배반과 불충실로 일관하였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탈출 34,6)하신 분으로 당신 백성을 돌보셨다. 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악인의 죽음이 아니라 그가 자기의 잘못된 길을 버리고 그분께 돌아오는 일이기 때문이다(에제 18,23 참조).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이에게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베드로의 물음에 아무 제약과 조건 없이 용서하도록 말씀하셨다(마태 18,21-22 참조). 그렇다면 정작 한없는 용서의 가르침을 남겨주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한계 앞에서 얼마나 더 큰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주시겠는가! 단연코 그리스도교 심판의 목적은 막연히 미래에 상과 벌을 내리는 것으로 한정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떠나간 이를 회개로,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왜, 우리의 정의롭고 자비로운 심판관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요한 12,47) 오셨기 때문이다. [2023년 9월 10일(가해) 연중 제2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