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교리] 사말교리 (3) 천국 : ‘영원한 행복으로의 초대’ 누구나가 그 내용과 기준만 다를 뿐 행복을 꿈꾼다. 그러면 사람은 언제 행복한가? 보통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것 먹을 때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할 때라고 한다(장영희). 실제로 사람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머물 때 행복함을 느끼며, 그 행복함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한다. 믿는 이의 행복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세례를 통해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하느님과의 첫 만남을 시작한 신앙인은 믿음의 여정 안에서 조금씩 그분을 알아가고 그분 사랑을 좀 더 깨달아갈수록 그 만남을 지속해 나가기를 원하며, 최종적으로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마주”(1코린 13,12)하는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를 누리기를 희망한다. 이렇듯 믿는 이에게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자 “가장 행복한 결정적 상태”(『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4)는 다름 아닌 하느님과의 궁극적 만남과 친교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이며, 이때가 바로 천국이다. 그러면 참 행복이 이루어지는 천국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어쩌면 일부는 천국을 죽음 이후 저 세상에 관한 일로만 여겨 너무 먼 이야기로 치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삶 가운데에 있으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한다면(마르 1,15; 루카 17,21 참조), 천국은 분명 우리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오늘’ 행복하지 못하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내일’은 그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닥치지 않았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 뿐”(톨스토이)이라고 한다면, 천국은 ‘먼 미래’ 이전에 ‘오늘’ 찾고, 두드리고 구해야 할 대상이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구원을 원하신다면(1티모 2,4 참조), 천국은 우리 스스로의 공로에 따라 받는 상급이 결코 될 수 없고, 언제나 하느님의 조건 없는 은총으로 주어진 선물과도 같다(『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35 참조). 그러니 미리 쉽게 이실직고하여(?) 천국은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라며 지나친 겸손으로 고개부터 숙이지 말자. 오히려 하느님께서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즐겁고, 아름답고, 행복”(성녀 도로테아)이 완성되는 천국을 선물처럼 주셨음에 경탄하며, 기쁨과 감사로 응답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천국은 여전히 우리에게 신비 중의 신비이다. 사실 예수님 역시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설명보다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다’는 비유를 들려주셨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늘날 적지 않은 이들이 천국에 대한 의문을 넘어 무관심으로 흐르고 있다. 다만 우리 믿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가장 가련한 사람일 수 있다(1코린 15,19 참조). 다시금 의식하고, 기억해 보자. 천국은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신명 4,7)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1코린 2,9) 두신 것 가운데 가장 큰 ‘행복으로의 초대’이다. 자, 이제 하느님의 복된 초대에 우리가 응답할 차례이다! [2023년 10월 15일(가해) 연중 제28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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