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38.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196항)
원수까지도 사랑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폭력의 악순환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 사진은 하마스의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 국경 마을 키부츠 비에리 모습. OSV 자료사진 “우리는 사회 안에서 평화의 장인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형제애 가득한 내일을 만드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생명의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기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청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에르난 레예스 알카이데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하는 희망의 기도」 중) 기도와 활동의 균형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루카 10,38-42) 주님 말씀이 좋아 그분 곁에 착 달라붙어 있던 마리아와 시중드느라 바빴던 마르타 두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마리아는 기도와 관상, 마르타는 활동과 봉사를 상징해 왔지요. 그런데 두 사람의 역할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 관건입니다. 기도와 활동의 조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가 없는 활동은 영적 가치를 상실한 채 세속의 일에만 골몰할 수 있으며 또한 일과 인간관계 안에서 지치고 소모돼 버릴 수 있습니다. 활동 없는 기도도 자칫 현실을 도외시하거나 이웃과 공동체에 무관심해질 수도 있으며,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마태 19,19) 신앙의 가르침과 동떨어질 수 있지요. 개인에게도 그러하지만 사회 안에서도 이 둘의 조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둘 다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들입니다. 폭력의 악순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전 과학과 기술, 문화와 지성이 최고조로 꽃피운 현대사회에서 기습공격이 감행되고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당하며 심지어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여기기 어려운 지난한 갈등의 역사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러나 의아한 것은 두 나라는 그 어떤 민족보다도 종교적 열성이 뛰어난 국가들입니다. 그런데 왜 전쟁과 폭력이 멈추지 않을까요? 물론 용서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경전에는 용서라는 말이 없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지난날 서로가 겪은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용서가 불가능하다면 폭력의 악순환도 반복될 것입니다. 영성의 결실, 원수 사랑 앞서 기도와 활동의 균형을 말씀드렸습니다. 기도란 영성을 의미하며 그 핵심은 바로 원수 사랑입니다. 물론 이 영성은 사회 정의를 촉진하고,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활동들과 함께,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만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도 이뤄져야 합니다. 그래서 「간추린 사회교리」에서도 이웃 사랑은 원수마저 포함해야 하며(40항)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원수 사랑과 자기 희생을 본받을 것을 강조합니다.(196항) 전쟁과 무고한 이들의 희생은 즉각 중단돼야 합니다. 전 세계적인 관심과 기도가 시급히 필요합니다. 이와 더불어 기도와 활동의 균형을 통해 일상 안에서 화해와 용서, 원수 사랑을 위한 영성을 살아 내고 그 영성의 결실을 우리 모두가 맺어야 합니다. “이웃이 비록 원수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를 사랑하신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며, 궁극적인 희생, 곧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희생까지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196항) [가톨릭신문, 2023년 10월 22일, 이주형 요한 세례자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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