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십자가(그리스도론) 성전에 들어섰을 때, 가장 처음 보이는 것은 제대 위로 중심을 잡은 십자가일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회심의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때로는 십자기를 보며 알 수 없는 부담을 느끼기도 합니다. 큰 어려움을 겪거나 상실감에 빠져 있을 때는 더욱 그렇지요.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만으로도 버티기 어려운데, 더욱 무거운 십자가를 감당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바쳐 사람들의 죗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마르 8,31 참조) 이 언명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고통스러운 구원 계획을 알고 계셨으며, 이 사명을 당신 삶의 목적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짜여진 계획이라면, 예수님은 그저 하느님의 계획을 이행하기만 하신 걸까요? 이러한 의구심은 이미 7세기부터 제기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예수님의 자발적 의지가 아니라 신적 의지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지요. 이처럼 예수님의 인간적 의지를 부인하며, 단일한 신적 의지로 일축하는 이론을 ‘단의론’(Monothelitism)이라고 합니다. 이 학설은 교회에 많은 혼란을 가져왔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위축시켰습니다. 이 혼란에 한 줄기 빛을 비춘 이는 증거자 막시무스(580-662)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에 완벽하게 동의하셨고, 이는 가장 자유로운 동참이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육화와 수난의 첫 순간은 삼위 하느님의 신적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순종과 죽음은 바로 성자의 고유한 인간적 의지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성부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해 성자께서 수난의 잔을 마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성자께서도 자신의 고유한 인간적 의지를 신적 의지에 일치시키켰습니다. 이 일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수난을 겪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야말로 우리 인간의 본성을 존귀하게 만드는 가장 내밀한 애정이 아닐까요? 다시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이 담긴 십자가를요. 십자가는 죄의 결과나 책임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순종이 일치함으로써 드러나는 신비로운 장소입니다. 이 두 분이 공통으로 원하신 것이 바로 인간의 구원이었습니다. 기도를 하며 처음 가졌던 의구심의 답을 찾게 된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십자가를 지우신 것이 아님을, 지금까지 나의 십자가를 당신께서 대신 지고 있었음을 말입니다. [2024년 3월 24일(나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서울주보 4면, 전인걸 요한보스코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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