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 희망과 애착, 그 사이에서 어떤 인디언 부족의 성년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부족에서 성년식을 치를 나이가 된 아이들은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가는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옥수수밭으로 들어가 반대편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이 붙는데, 가장 좋은 옥수수를 하나 가져와야 한다는 것, 옥수수는 단 한 번, 하나만 딸 수 있으므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밭을 가로지를 때는 한 번 지나온 길로 다시 돌아가지 못합니다. 시험 결과, 대부분의 아이들은 작고 볼품 없는 옥수수를 가져옵니다. 밭을 가로지르는 동안 좋은 옥수수들을 많이 발견하지만 ‘더 좋은 게 있겠지, 조금 더 큰 게 있겠지.’ 하면서 지나치다 보면 어느새 출구에 다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출구 근처에서 그럴듯한 것을 가져오게 되는데, 보통보다도 못한 옥수수지만 정신없이 가져오느라 이제 살필 시간도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적인 차원의 희망이 보이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희망하지만 좀처럼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치고 또 다른 것을 찾아 헤맵니다. 지금의 시간이 영원하리라는 착각 속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대부분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은 허전함, 혹은 또 다른 욕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희망은 무엇일까요? 희망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주요하게 여기는 세 가지 덕(믿음, 희망, 사랑) 중 하나로,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은총이 주는 도움에 힘입어 하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하는 덕’입니다. 즉 희망의 덕은 세속적인 것이 아닌 하느님을 희망하게 합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희망’과 ‘그리스도교인의 희망’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인간의 희망’은 일시적이며 변화하는 특성을 지니고,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이 희망은 사실상 ‘애착(좋아하여 집착함)’에 가깝습니다. 반면 ‘그리스도교인의 희망’은 영원하며 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해 참 행복의 의미를 전하심으로써(마태 5,1-12 참조) 세상의 시련과 유혹을 이겨내고 하느님께 희망을 둘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 희망은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줌으로써 우리를 영원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광활한 옥수수밭과 같은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찾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기, 재물, 승진, 학벌, 외모, 건강, 자녀의 성공 등 다양할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이것이 최종 목적이 될 경우 우리의 삶은 불행해집니다. 성취하지 못할 경우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게 되며, 성취할 경우에는 또 다른 욕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참된 희망의 목적이 되어야 할 하느님께 다가가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미 여러분께는 가장 좋은 희망의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과 자비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바로 그분을 주저함 없이 붙잡으시고 이 세상을 통과하시길 바랍니다. [2024년 7월 28일(나해)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서울주보 4면, 방종우 야고보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윤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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