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교리] 고해성사 ① “죄를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 베드로 성당을 비롯한 로마의 4대 성당은 역사적-문화적-교회사적인 내적 가치는 물론이고, 외적인 웅대함과 장엄함 또한 자랑한다. 여기에 더해 4대 성당만의 아름다움의 빛을 밝혀주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365일 동안 매일매일 여러 나라 말로 전 세계 사람들의 고해성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곧 이 4대 성당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떠나간 수많은 이가 다시금 하느님의 크고 강한 자비를 체험하며 다시 그분께로 ‘돌아옴’이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에 일부는 신앙생활 여정 중에 ‘가깝고도 먼 것’ 중의 하나를 고해성사로 꼽으며, 그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한다. “고해성사는 매번 할 때마다 너무 부담되고, 어려워요!” “성사를 보아도 큰 기쁨이 없고, 숙제처럼 느껴져요!” 아무래도 고해성사의 가장 큰 부담은 ‘고백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사실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는 일도 낯설고 어려운 일인데, 심지어 나의 부족함과 허물로 비치는 죄를 고백하는 일은 더더욱 망설여질 수 있다. 다만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고해성사 때 ‘누구’를 위해서 고백하는가? “숨은 일도 보시는”(마태 6,4) ‘하느님’이 내 죄를 모르실까 봐 알려드리는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뉘우침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다시금 시작하고 일어서려는 ‘나’를 위해서인가? 사실 인간은 어떤 잘못과 죄가 드러나면 가장 첫 번째로 보이는 행동이 숨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성경에서 첫 인간은 죄를 짓고 곧바로 숨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죄에 빠진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물음은, ‘너 왜 죄를 지었냐?’가 아니라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이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감추며 숨어서 괴로워할지도 모를 인간에게 죄를 추궁하기보다, 당신 앞에 다시 돌아와 고백하라고 초대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세례를 통해 모든 죄의 용서를 받았지만, 인간적 부족함과 한계는 여전히 우리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러다 보니 세례 이후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며 충실히 살아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유혹-욕심-미움-증오 등에 무너져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로마 7,15) 하며 하느님을 등지고 떠나기 일쑤다. 이때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이 놓인다. 하나는 내가 범한 죄만을 생각하며 죄책감과 비참함에 빠지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나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청하며 다시 새롭게 출발하는 일이다. 두 가지의 선택 앞에선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백의 용기를 통해 고해성사의 큰 은총을 얻도록 이렇게 호소한다. “죄를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죄를 고백하려고 고해소 앞 긴 줄에 서 있으면 부끄럽기도 하고 별별 생각이 다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해방된 사람, 당당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 용서받는 사람, 깨끗한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고해성사의 아름다움입니다”(2014.02.19.). 그렇다면 우리는 고해성사 때 자신이 지은 ‘죄의 고백’으로 시작하지만, 마무리는 어떤 상황에도 우리 손을 놓지 않고 붙들어 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찬미의 고백’으로 끝을 맺어야 하지 않을까(『교리서』 1424 참조). [2024년 8월 18일(나해) 연중 제20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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